무제 3
매우 평화로운 오후였다.
간만에 따뜻하게 풀린 날씨에 카구라는 사다하루와 밖으로 뛰어 나간지 오래였고, 해결사 사무실의 청소를 마친 신파치는 노곤했는지 소파에 누워 어느샌가 잠들어 있었다. 신파치가 점프를 어딘가로 싹 다 치워버린 탓에 심심해진 긴토키는 점프를 찾아 온 집안 구석구석을 다 뒤졌지만 결국 찾지 못한 채 깨끗해진 집안을 어정거리고 돌아다녔다. TV나 볼까 하고 거실로 돌아왔지만 신파치는 아직 자고 있었다. 지금 시끄럽게 굴어서 깨우면 분명 잔소리를 한 바가지 이상 듣고 집에서 내쫓길 것이었다. 그래서 긴토키는 일단 신파치가 자고 있는 소파의 반대편에 앉았다. 너무너무 한가해서 손발이 근질근질했다. 뭐라도 하고 싶었다. 그 때, 맞은편에서 자고 있는 신파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소년은 어찌나 피곤했던지 안경을 쓴 채로 잠들어 있었다. 긴토키는 살금살금 신파치에게 다가가 잠든 신파치의 얼굴 앞쪽에 쭈그리고 앉아 천천히 안경을 벗겼다.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소년의 피부에 긴토키는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는 손을 들어 소년의 볼을 쓰다듬었다. 너무 매끄러워서 오타에가 자기 화장품을 같이 발라주나 싶었다. 아니면 어려서 그런가? 고개를 갸웃하던 긴토키는 소년의 입술에서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을 깨달았다. 잘 보니 입술이 붉은 게 아무래도 오타에가 뭔가를 발라준 게 확실했다.
핥으면, 달콤한 맛이 날까?
그 생각을 한 순간, 긴토키는 이미 신파치의 입술을 핥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에 당황한 것도 잠시, 정말로 맛있었다! 는 것이 문제였다. 요 며칠 단 걸 못 먹어서 그런지 단 걸 입에 대자 눈이 핑글핑글 돌았다. 솔직히 말하면, 더 맛보고 싶었다. 다행히 소년은 아직 깨지 않았다. 긴토키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마음으로 소년의 입술을 할짝였다. 역시 달았다. 자신의 착각이 아니었다. 욕심이 생긴 긴토키는 신파치의 안경을 바닥에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신파치에게 입을 맞췄다. 잠들어 있는 소년의 입술은 쉽게 열렸고, 긴토키는 신나서 혀를 들이밀었다. 소년을 맛보던 긴토키는 호흡이 곤란해진 소년이 깨어나려고 하자 번쩍 정신을 차렸다. 깜짝 놀란 긴토키는 황급히 소년에게서 떨어졌다. 붉어진 얼굴을 어떻게 숨겨야 할지 몰라 허둥대면서. 그리고 신파치가 인상을 찌푸리며 잠에서 깨자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때였다. 자신의 발 밑에서 빠직하는 소리가 들렸다.
“빠직…?”
긴토키와 신파치는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설마 하면서 긴토키는 서서히 발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본 순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잘 안 보여 잔뜩 인상을 찌푸린 신파치가 몸을 굽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콧등 부분이 완전 작살, 알은 찌그러져 있고 테는 구부러져 있다. 어쨌든 그것은 신파치의 안경(이었던 물건)이었다.
“기인사아앙~?”
신파치의 목소리가 이처럼 무섭게 들린 적이 없었다.
“아하… 아하하… 아니, 그게 말이지, 신파… 컥!”
신파치의 분노의 킥을 맞고 옆으로 나동그라진 긴토키는 땀을 뻘뻘 흘리며 신파치를 바라보았다.
“잠깐, 신파치! 잠깐 내 얘기 좀…”
그러나 분노에 찬 신파치는 이미 신파치가 아니었다. 악귀, 괴물, 악마, 아니 하여튼 그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도대체 제 안경에 무슨 짓을 하신 거죠?”
“아니,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안 그래? 하하… 이야, 우리 신파치군 안경 안 쓰니까 훨씬 멋있다!”
그런 사탕발림은 신파치에게 통하지 않았다. 신파치에게서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언제는 제 안경에 저 자체라면서요? 신파치-안경=0이라고 그랬던 게 누구죠?!”
죽어라, 옛날의 나 자신. 역시 말은 한 번 하면 주워담을 수 없다던 선인들의 말을 새겨들었어야 했어.
“그건 애들 분위기에 휩쓸려서… 정말 미안! 신파치, 일단 진정해. 대신 뭐든지 할 테니까…!”
긴토키는 무릎을 꿇고 신파치에게 두 손 모아 애원했다. 그 때, 분노의 아우라를 흩뿌리던 신파치가 멈칫했다.
“흐응… 그 말 진짜죠? 한 입으로 두 말하기 없기에요. ‘뭐든지 한다’고 했죠?”
죽어라, 지금의 나 자신. 자고로 ‘뭐든지 한다’는 말은 ‘나를 뛰어넘어 봐라(혹은 쓰러뜨려 봐라)’는 말 다음으로 금기어라고 했는데…!
“그, 그래, 그럼 뭘… 해 줄까?”
일단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물었다. 그 때의 신파치 표정은, 그보다 더 악랄할 수 없었다.
“비상금, 전부 다 가져와요.”
귀신 같은 놈, 어떻게 내가 비상금을 숨겨 둔 장소를 전부 알고 있는 거지? 긴토키는 투덜대며 그 동안 몰래 모아왔던 비상금을 꺼냈다. 모아 놓고 보니 꽤 많았다. 이 돈으로 파르페나 사 먹으러 갔으면 이런 일은 안 생기는 건데. 후회하는 긴토키의 눈 앞에서 신파치는 신중한 표정으로 돈 계산을 하더니 그 중 상당 금액을 종이봉투에 챙겼다.
“뭐, 뭐 하는…”
“그 동안 밀린 저랑 카구라 월급이요. 비상금이 이렇게 많을 줄 알았으면 진작 받아가는 건데.”
딱 잘라 말하는 신파치의 얼굴에 긴토키는 말도 못하고 어버버 거렸다.
“자, 이제 남은 돈으로는……”
“저, 전부 다 쓰려고?”
절박한 심정으로 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악귀의 표정을 한 신파치의 미소였다. 이럴 땐 역시 오타에의 동생답구나 싶었다.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사람 하나 죽일 기세랄까?
“나갈 거니까 긴상이 에스코트해요.”
“어, 나가려고?”
여전히 악귀의 형상을 한 신파치가 박살 난 안경을 들어 보였다.
“그럼 이걸 쓰고 살아야겠어요? 빨리 안경점으로 앞장서요.”
긴토키는 깨갱 하면서 앞이 잘 안 보이는 신파치를 데리고 사무실을 내려왔다. 잔뜩 인상을 쓰며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오는 신파치의 손을 잡아 이끌면서. 스쿠터에 태우자 평소보다 찰싹 붙어 매달려 왔다. 안 보여서 불안한 거겠지. 긴토키는 피식 웃으며 거리를 달렸다.
“이거…… 새로 하나 맞추시는 편이 낫겠는데요. 쓰신 지도 오래되신 것 같은데 이 참에 바꾸세요.”
점원의 말에 신파치는 테부터 안경 알까지 가격을 듣고 한참 협의하더니, 어떻게든 싸게 해결하려고 점원과 싸우고 있었다.
“잠깐! 신파치, 남은 돈 다 써도 되니까 제일 좋은 걸로 해.”
“긴상…?”
신파치가 의외라는 듯 놀라서 긴토키를 바라보았다.
“네 안경 깬 건 내 탓이니까 말이야.”
“…그래요? 돈 좀 남으면 파르페나 사 먹을까 했는데 그럼 그렇게 할께요.”
“아, 잠깐! 역시 방금 말은…”
“방금 말은 뭐요?”
방금 웃고 있지만 여기서 ‘방금 말은 취소’ 같은 소리를 하면 분명 다시 악귀로 돌아오겠지… 긴토키는 눈물을 머금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신파치가 시력 검사를 받은 후 새로운 안경이 만들어지길 기다리는 동안 신파치와 긴토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파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긴토키도 눈치를 보느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 남은 돈은 고작 3백엔. 이걸로는 역시 파르페는 무리지. 좋아, 파칭코에서 불려서 오면!! …이라고 순간 생각했지만 그랬다간 비 오는 날 먼지 나듯이 두드려 맞고 쫓겨날 확률이 100%였다. 이 계획은 조용히 말소.
그치만 이 어색한 침묵은 어쩌란 말이야? 역시 이럴 땐 내가 뭐라도…
“긴상.”
“어… 어?”
갑자기 신파치가 자신을 부르는 바람에 긴토키는 바보처럼 멍청하게 대답했다.
“일단… 고마워요.”
“어… 어?”
“손님, 안경 다 됐습니다-”
뭐가? 라고 묻기도 전에 신파치는 점원의 부름에 카운터 쪽으로 가 버렸다. 도대체 뭐가 고맙다는 거지? 어안이 벙벙해진 긴토키틑 신파치의 뒤를 따라 안경점을 나왔다. 새로 맞춘 안경을 쓴 신파치는 어지러운지 비틀댔다. 소년의 팔을 잡아 부축하는 긴토키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러다 넘어질라. 나 잡아.”
소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살짝 붉어져 보이는 건 노을이 붉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자신의 희망사항인 걸까?
“집에 가요, 긴상.”
“응.”
긴토키는 스쿠터를 몰고 집으로 가는 지름길로 들어섰다. 조용한 골목에 스쿠터가 달리는 소리만 들렸다.
“아-아. 돈이 좀 더 남았으면 츠우 싱글을 사는 건데.”
“너 아깐 파르페 먹는다며?”
“그건 츠우 싱글 사고 나서 돈이 남으면, 의 얘기죠.”
이 얄미운 녀석.
“그런 거 사는 데 내 돈은 한 푼도 못 줘!!”
“지금 어디서 큰 소리예요? 내 안경 깬 대신 뭐든지 다 한다고 한 게 누군데 그래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이 아저씨가!!”
신파치가 소리를 질렀지만 긴토키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스쿠터의 속력을 올렸다.
“신파치!!”
“왜요!!”
말투가 퉁명스러워진 신파치가 대답해 왔다.
“넌 역시 안경 쓴 게 훨씬 어울려!!”
잠시 말이 없던 신파치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도 알아요!!”
크게 웃는 두 사람을 태운 스쿠터는 어두워진 골목을 신나게 달려 해결사 사무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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