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그는 자주 악몽을 꾼다. 내가 고교생이 되어 도쿄로 올라와 그와 함께 살게 된 후부터, 그 빈도는 점차 늘어난 것 같다. 그를 누구보다 제일 잘 알고 있는 나이기에, 나는 그 악몽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내가 나오는 꿈이다. “으으…” 헛소리 한 마디 하는 법 없이,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그저 울기만 한다. 입을 열었다간 해선 안 될 말이라도 나올 것 같아서인지, 그는 이를 악문 채 희미한 신음소리만 내뱉는다. 물론 나는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에, 그가 악몽을 꾸고 있을 때면 다소 거칠게 그를 흔들어 깨운다. “다케오… 다케오!” 내가 깨우면 그는 헉 하고 숨을 들이키면서, 눈을 떠 나를 바라보고는 떨리는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더듬어 만져본다. 그의 눈 앞에 있는 내가 환영인지 진짜인지 확인해 보는 것이다. 그가 내 얼굴을 만지며 나를 확인하고 있을 때에도, 나는 쉼 없이 악몽을 꾼 그를 달랜다. 왜냐하면 그가 계속 울고 있기 때문에. “쉬잇, 다케오. 난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 그러니까 울지 마. 안심해. 난 죽지 않았어.” “넌 내가 죽였어…” 꺼질 것 같은 잠긴 목소리로, 그가 나를 보며 그렇게 말한다. “아니야, 난 죽지 않았어. 이렇게 네 곁으로 다시 돌아왔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가 나를 확인할 때까지. 그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쿠라키…!” 그가 내 목 뒤로 손을 뻗어 나를 끌어안으며 흐느낀다. 차마 큰 소리로 울지도 못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몇 번이고 내 이름을 부르면서, 그렇게 운다. 다케오는 아직도… ‘그 때’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거다. 그 자신의 손으로, 이 나를 찔렀던 것을. “…바보.” 겨우 잠든 다케오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이렇게 너의 옆에 있다고 하는데도. ‘그 날’이 가까워질수록 그는 더욱 심한 악몽에 시달리는 듯 했다.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는 다케오의 모습에, 난 더 이상 이렇게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 날’ 그와 함께 이즈모로 향했다. 아니, 끌고 갔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 “여기도 많이 변했네.” “…….” “왜 그래? 다케오. 얼굴이 안 좋아.” “쿠라키…” 그가 내 팔을 꽉 붙잡았다. “왜? 두려워? 또 다시 내가 네 앞에서 사라질까봐?” 다케오는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들어 내 얼굴을 바라본다. 그의 얼굴에 담겨 있는, 불안의 그림자. 내 팔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풀어, 그 손등에 입을 맞춘다. “난 두 번 다시 널 혼자 두고 가지 않아. 이곳에서, 약속한다.” 기뻐하는 듯, 슬퍼하는 듯, 그의 얼굴은 미묘했다. “너도 할 말이 있지 않아?” “…….” 그는 악몽을 꾸면서 그랬듯이, 지금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인다. “말해 봐, 다케오. 네가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없어.” 그 말에 그는 고개를 번쩍 들어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응, 나랑 헤어지기 싫어하는 것에는 만족했다. “……그, 때. 너를 찔… 러서, 정말……” 말하는 것조차 괴로운 것이리라. 그의 말이 띄엄띄엄 끊길 듯 이어진다. “미… 미안. 어쩔 수 없었다곤 해도… 내가, 너를. 내가 너를…!” 그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흘러 넘쳤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내 품에 안긴 채 그는 드디어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울면서 말하느라 분명하게 들리진 않았지만, 그는 나에게 용서를 비는 듯한 말을 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울음을 그쳤고, 나는 그동안 그를 계속 껴안고 있었다. 그래, 이제 됐다. 내 품 안에서 작은 새처럼 조그맣게 떨면서 숨을 쉬고 있는 다케오에게, 나는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좋아한다, 다케오.” “쿠라키…” “넌 날 찔렀어. 하지만 네가 날 구원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부정하려는 그의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나는 재빨리 뒷말을 이었다. “그리고 넌 나를 구원함으로써 이 세상을 구원했다. 네 눈 앞에 있는 나와, 이 이즈모는, 네가 구원한 거야.” 그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무녀로서가 아니라, 인간 후즈치 쿠라키로서 말한다. 네가 좋아, 다케오. 너를 원한다.” “나, 나도…” “응?” “나도 네가 좋아… 하지만……” 그의 망설임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너를 용서할게. 나의 죄를 네가 용서해 주었듯이, 나도 너의 죄를 용서해 줄게. 거부하려 하지 마! 너의 죄는 나 때문에 비롯된 거니까, 너를 용서하는 건 나를 용서하는 것도 돼. 너는 나를 용서해 주지 않을 생각이야?” “아니야! 넌 잘못한 게 없어, 쿠라키!” “그렇다면 너 또한 마찬가지다! 다케오!” “아아… 아아!!” 그는 나를 마주 안고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이제 좀 진정됐어?” “응.” 그는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네가 날 구원한 건 사실이야. 내가 널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고. 잊지 마.” “…응.” “자, 그럼 가자. 유카랑 코가 본가에서 기다리고 있을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그와 본가로 향하기 전에, 다시 한번 눈 앞의 전경을 바라본다. 거대한 념이 있던 자리. 결계가 있던 곳. 그 날, 내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사라졌던 날… “쿠라키.” “응?” 나와 손을 잡은 채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다케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한다. “…고마워.” 다케오는 그 이상 뭐라 덧붙이지 않았지만, 나는 ‘고마워’ 그 한마디로 다케오가 말하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아아.” 미소를 지으며 나는 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놓고 싶지 않은 손이다.
“쿠라키, 이젠 무녀랑 신검, 념의 정화 같은 건 다 잊고 평범하게,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아.” “…내가 하고 싶은대로?” “응. 운명이나 책임감에 억눌리지 말고 자유롭게.” “자유롭게…"
쿠라키의 손이 다케오의 얼굴을 감쌌다. 다케오가 멍하니 쿠라키를 올려다 본 순간, 쿠라키의 얼굴이 다케오 쪽으로 기울어졌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쿠라키의 입술. 나와 똑같이,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람이다.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쿠라키?” 왜 키스한거야.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차분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쿠라키의 눈빛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렇지만. “날 선택하면, 언젠가 후회하게 될 거야.” “후회 따위 안 해.” 너무나도 단호한 어조에 다케오는 씁쓸하게 웃었다. “두 번 사는 인생이다. 틀릴 리가 없어. 내 혼이 너를 부르고 있다, 다케오.” 그렇지만 넌 이제 열여섯이고 난 이제 서른아홉이야. 네가 좀 더 지나서 대학생이 되고, 사회에 나가도 넌 날 선택할까? 전보다 더 많은 만남을 가지고, 더 많은 시간이 흘러도, 네 영혼은 나를 부를까? 우리를 이어주는 전생의 인연이란 얼마나 길까? 내가 너를 더욱 사랑하게 됐을 때 그 인연이 끊어진다면 난… 난 어떻게 될까? 아직 닥쳐오지도 않은 이별에 다케오는 보이지 않게 몸서리쳤다. 그렇지만 나중에 버려지더라도 할 수 없지. 쿠라키에게 그런 짓을 한걸. 그거에 비하면… 덜 아플거야. 다시 돌아온 쿠라키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것, 그에게 버려지고 싶지 않다는 것, 그렇기에 자신을 선택하지 않아줬으면 하는 것… 복잡한 감정이 태풍처럼 쓸고 지나갔지만 다케오는 자신의 불안을 쿠라키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말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 웃는 다케오를, 쿠라키가 강하게 끌어안았다. “네가 시오리 때처럼 날 두고 멀어지지 않는다면… 난 너를 떠나지 않아. 약속한다.” 그의 말을 듣자 다케오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솟았다. 힘들었을 쿠라키의 옆을 떠나 시오리와 희희낙락하고 있던 자신. 그는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그래, 그 때도 쿠라키는 나를 이해해 주었어. 나를 기다려 주었다. 이번엔 내가 그의 마음에 보답해야 할 때야.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가 나를 선택하는 게 좋은 일일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그의 옆에 내가 있어도… 그에게 죄를 지은 내가 그의 옆에 있어도… 쿠라키는 내가 아니라 좀 더 좋은 사람과 있어야 행복해지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다케오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것을 느낀 쿠라키가 더욱 강하게 다케오를 부둥켜안으며 외쳤다. “뭘 생각하고 있는거야! 내가, 이 내가 너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내 말 이외에 뭐가 더 필요하지?” 아아, 그래… 쿠라키가 직접 말하는 거니까. 지금 이것은 분명한 진실. 언제 또 다른 진실이 닥쳐올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일단, 나를 지탱해주고 있는 이 팔에 기대어보자. 나를 원한다고 말하는 이 목소리를 믿어보자.
다케오는 쿠라키를 껴안고 펑펑 울었다. “뭘 울고 그래.” “쿠라키… 다행이야, 돌아와서.”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또다시 눈물을 주륵 흘렸다. “그만 울어. 눈 붓겠다.” “응.”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은 후 그는, 그제야 방긋 웃으며 환한 미소로 쿠라키를 맞이했다. “어서 와, 쿠라키.” “응, 돌아왔어.”
다들 복잡한 심경이었다. 쿠라키가 돌아왔다고 방긋방긋 웃고 있는 다케오만 제외하고. “쿠라키가 코우키로…… 으음.” “뭘 그렇게 고민해? 괜찮아, 아직 학교도 안 들어갔고.” 고민하는 코에게 다케오가 태평하게 말하자, 유카가 머리를 퍽 소리가 나게 때렸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 바보야! 정신은 열일곱, 아니 그 이상일텐데 소학교에서 잘 지낼 수 있겠어?” “응.” “다케오야 그렇겠지! 하지만 쿠라키가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유카의 말에 다케오는 잠시 멈칫했다. “그렇네… 동갑인 애들하고도 잘 못 어울렸지.” 생각에 잠겼던 다케오는, 고개를 돌려 쿠라키를 바라보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소학교부터 보내야 한다고 생각해.” “무슨 뜻이야?” “이번에야말로 평범한 생활을 해야한다고 생각해. 더 이상 가문이나 무녀 일에 얽매이지 않는.” 다케오의 말에 모두들 조용히 수긍했다.
“오늘 쿠라키 생일이지? 응, 최대한 빨리 갈 테니까.” 다케오는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조수석에 둔 생일선물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쿠라키의 열여섯번째 생일이었다. 열여섯― 쿠라키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이 났다. “쿠라키, 나 왔어―” 그래서였을 것이다. 생일 선물을 품에 안고 환하게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선 다케오가 쿠라키를 보고 굳은 것은. 다케오의 손에서 선물이 툭 떨어졌다. “왔구나, 다케오.” “쿠라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몸은 분명 코우키의 것일텐데, 그는 점점 전의 쿠라키를 닮아갔다. 그리고 열여섯이 된 지금은, 완전히 똑같았다. 왠지 모르게 순간적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이봐, 왜 우는거야? 다케오.” 당황한 쿠라키가 다가와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 모습의 너를 다시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어, 그 때는…” 다케오의 손이 쿠라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쿠라키는 눈을 감고 자신의 볼을 감싸는 다케오의 손바닥에 살며시 입술을 갖다댔다. “나야말로… 너를 다시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다케오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글썽였다. 그런 다케오를 힘을 주어 꽈악 껴안은 쿠라키가 목소리를 쥐어짜듯 중얼거렸다. “울지 마. 이… 바보야.” “미안, 쿠라키…” “괜찮아. 이제 그만 너 자신을 용서하고 편안해져.” “응, 고마워…” 말은 이렇게 하지만 평생 잊지 않을 다케오라는 것을, 쿠라키는 알고 있었다.
벚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지는 따스한 봄날. 입학식으로는 딱 적격인 날이었다. ‘쿠라키는 잘 하고 있을까…’ 다케오는 이즈모 쪽의 하늘을 바라보며 멍하니 입학식 행사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어서 신입생 대표의 선서가 있겠습니다.” 신입생 대표라면 입학시험에서 수석이라는 얘기잖아. 대단하다~ 어떤 아이일까? 멍하니 있던 다케오는 그제야 단상을 바라보았다. “신입생 대표, 후즈치 코우키. 앞으로.” “……?” 다케오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후, 후즈치 코우키? 설마. 쿠라키가 여기 있을 리가… 애써 부정하려던 다케오의 눈 앞에, 단상으로 나가기 위해 지나가던 쿠라키의 모습이 보였다. 다케오가 얼빠진 목소리로 “쿠라키?” 하고 부르자, 그는 피식 웃었던 것이다. ‘으으, 저 녀석~ 비웃다니!’ 울컥한 것도 잠시, 다케오는 단상에 올라가 신입생 선서를 하고 있는 쿠라키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나이의 쿠라키…… 그것도 벌써 몇 년 전의 일인지.
“이봐, 쿠라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입학식이 끝나고 다케오는 쿠라키를 불러내 다그쳤다. “고등학교는 도쿄로 가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난 그런 소리 못 들었어!” “이상하군. 코랑 유카한테 말했었는데.” ‘고등학교는 다케오네 학교로 가 볼까?’ 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얘기했었다는 것은 말하지 않은 채, 쿠라키는 시치미를 뗐다. “집에서 학교 멀잖아. 어떻게 다니려고?” “니네 집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뭐…!” “설마 ‘조카’ 재워줄 정도도 안 된다는 얘기는 하지 않겠지?” 싱긋 웃으며 말하는 쿠라키의 얼굴에, 다케오는 결국 지고 말았다. “으으, 알았어…” 그렇게 다케오는 쿠라키와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쿠라키가 입학한 학교가 다케오네 학교라는 것을 알고 코와 유카도 당황해 했지만, ‘그게 뭐가 어때서?’라고 말하는 듯한 쿠라키의 태도에 다들 수긍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쿠라키가 코우키로 살게 되었을 때, 다들 정했던 것이다. 쿠라키가 하고 싶은대로, 자유롭게 살도록 해 주자고. 코우키인 지금도, 쿠라키는 여전히 인기가 좋았다. 아름다운 용모와 좋은 집안 내력으로 인해, 학기 초부터 쿠라키는 학생들의 입소문의 대상이 되었다. “코우키군 너무 멋지지 않니? 수석할 정도면 머리도 좋구~” “게다가 그 ‘후즈치’ 기업의 후계자라던데.” “그런 것보다 저 미모! 왠만한 여자애들보다 더 예쁘잖아. 우리랑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질 않아.” ……다 들려. 사람의 얘기를 할 땐 조금 더 작은 소리로 하는 게 어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쿠라키는 질렸다는 얼굴을 했다. 여학생들의 수다를 피해 교실을 나서자, 복도에 다케오가 있는 것이 보였다. “다케오.” “아, 쿠라키.” 쿠라키가 가까이 다가가자 다케오를 둘러싸고 있던 여학생들이 뒤로 물러섰다. “나․나․치․선․생․님!” 다케오가 짐짓 엄한 체 쿠라키에게 말하자 쿠라키도 똑같은 어조로 말했다. “코․우․키!” “…으으.” 할 말이 없어진 다케오는 볼을 부우하고 부풀렸다. “뭐야, 불만 있어?” “그치만…” 넌 커 갈 수록 옛날의 너랑 똑같아진단 말이야… 하고 다케오는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학생들 사이에서 다케오를 불러낸 쿠라키는 자리를 피하기 위해 걸으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야스코가 이번 주말에 본가에 들리라고 하던데.” “에엣? 또 선 보라는 이야기인가… 가기 싫은데… 너는?” “나도 안 가. 돌아오라고 하는 야스코 상대하기도 지쳤어. 돌아갈 거면 애당초 도쿄로 오지도 않았어.” “그거야 그렇지만… 야스코 마음도 헤아려줘.” “넌 맨날…!” 소리치려던 쿠라키는 복도에 있는 학생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을 깨닫고, 화를 눌러 참았다. “…따라 와.” 쿠라키는 학생들의 이목을 피해 교사용 휴게실로 다케오를 끌고 갔다.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거야? 쿠라키.” “네가 자꾸 야스코 마음을 이해하라고 하잖아. 그만해! 다 알면서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하냐?” “…그래도…” “하여튼 넌…” 시무룩해져 있는 다케오를 보면서, 쿠라키는 그런 점이 마음에 안 들어, 하고 중얼거렸다. 왜 저 녀석은 좀 더 나만을 생각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나만을 바라보게 할 수 있지? 쿠라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케오를 끌어안았다. “다른 데 보지 말고… 다시 한 번 더 날 구원해 줘, 다케오.” 쿠라키는 자신에게 안겨있는 다케오의 몸이 일순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다케오는, ‘그 때’의 일을 기억해낸 것이다. “나, 난…” 다케오는 심하게 떨고 있었다. “너… 아직도 그 일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 손으로 널…” 무너지려고 하는 다케오의 어깨를 꽉 붙잡고, 쿠라키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다케오! 정신차려. 나를 봐!” 눈물로 빛을 잃고 흐려진 다케오의 눈이 쿠라키의 빛나는 눈과 마주쳤다. “자, 난 이렇게 살아있어. 지금 이렇게 너의 앞에 있다구!” 다케오의 얼굴에 희미하게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응, 그렇지…” 다케오는 손을 들어 쿠라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다시, 돌아왔어…” 기어코 다케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정말 다행이야…” 쿠라키의 목을 끌어안으며 우는 다케오의 등을 토닥이며, 쿠라키는 미안함과 동시에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그 때’의 일을 빌미로 하면 다케오는 평생 자신을 혼자 두고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다케오.” “응?” “속죄하고 싶어?” “응…” “그럼, 평생 내 곁에 있어. 아무한테도 가지 말고.” 다케오는 고개를 끄덕끄덕하고는, 쿠라키에게 안긴 채 몸을 기대었다. “응, 니가 그러라면 그럴게. 평생 네 옆에 있을게, 쿠라키.” 아아, 이것으로― 이것으로 다케오는 평생 나의 것이다. 그런 만족감과 안도감에, 쿠라키는 미소지으며 다케오를 꼭 껴안았다.
어제 눈이 내리고 난 뒤 타츠미야 섬은 급격히 기온이 내려가 있었다. 눈은 거의 다 녹아 없어진 상태였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도 추운 공기에 코끝과 귀 끝이 차갑게 얼어붙는 날씨였다. 카즈키는 벤치에 앉아 손을 호호 불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소우시를 두고 돌아온지 벌써 5년. 카즈키는 매일 같이 이곳에 앉아 소우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은 이미 성인이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입는 것과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었지만 카즈키의 시간은 5년 전에 멈춰져 있었다. 몸은 성장했지만 자신 안의 시계만이 멈춘 그대로였다. 가능하다면 몸도 성장하지 않은 채, 소우시가 기억하고 있을 5년 전의 자신의 모습으로 있고 싶었다. 물론 그것은 과한 욕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카즈키군.” “아, 토오미. 추운데 여기까지 왔어? 미안하네.” “으응, 괜찮아.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걸 뭐.” 토오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웃어 보였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보온병을 꺼내더니 카즈키에게 내용물을 따라주었다. “녹차야. 몸이 따뜻해질 거야.” “일부러 고마워, 토오미. 이렇게까지 안 해줘도 되는데…” “괜찮다니까. 자, 마셔.” “응, 잘 마실께.” 카즈키는 추위로 빨갛게 얼은 손으로 컵을 받아 차를 마셨다. 토오미는 그런 카즈키의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카즈키의 옆얼굴을 슬쩍 곁눈질했다. “카즈키군. 추운데 계속 여기에 있을 거야?” “응. 여기에 있고 싶어. 추우니까 토오미는 얼른 들어가.” “음… 조금만 더 여기 있다 갈께. 나도 기다리고 싶으니까.” 카즈키는 작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 토오미는 깨끗하게 개인 겨울 하늘을 멀리 내다보았다. 바다는 잔잔했다. “카즈키군.” “응?” “미나시로군…” 돌아올까? 라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대신 질문을 바꿨다. “미나시로군 기다리면서 무슨 생각해?” 카즈키는 일이 끝나고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을 여기에서 소우시를 기다리는데 쓰고 있었다. “그냥, 이것저것. 우리 어렸을 때 같이 놀았던 것부터 그 날 헤어지기 전까지…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 그러다가 추억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기도 하고. 소우시가 돌아오면… 어떤 모습일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앞으로 어떻게 할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가.” 그렇게 말하는 카즈키의 얼굴은 행복해 보여, 토오미는 그를 말리는 것은 앞으로도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카즈키는 즐거운 듯 계속 이야기했다. “있잖아, 토오미. 토오미는 소우시가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 거라 생각해?” “미나시로군? 음… 아마, 예전 모습 그대로 돌아오지 않을까?” “역시 토오미도 그렇게 생각해?” “그치만 솔직히 미나시로군이 나이 든 모습은 잘 상상이 안 되는걸.” 토오미는 머리 속으로 자신들처럼 어른이 된 소우시를 상상해보려 애썼지만 역시 잘 되지 않아 그만두었다. 여전히 떠오르는 것은 기억 속에 있는 소우시의 모습이었다. “아마 소우시는 우리처럼 어른이 되어 와도 멋있을거야. 원래 그런 녀석이니까.” 하긴 원래 소우시는 어른스러웠다. 토오미는 그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모습으로 올까… 설마 우리보다 나이 들어 오지는 않겠지.” 카즈키는 키득 웃었다. 그에게 있어서 소우시가 돌아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며 불변의 사실이었다. ‘소우시가 돌아올까?’ 이런 의문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토오미는 속으로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이대로 가다간 소우시가 돌아올 때까지 카즈키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을 것이었다. 물론 자신도 포함해서. “카즈키군. 내일, 미나시로군 생일이지?” “응. 토오미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야 카즈키군이 기억하고 있으니까. “내일 다같이 여기에서 미나시로군의 생일 파티를 하자.” “정말?” 카즈키의 얼굴에 또 다시 환한 미소가 퍼졌다. 자신만이 아니라 모두가 소우시를 기억해 준다는 사실이 기뻤던 것이다. “그래, 그러자. 그럼 내일 퇴근하고 준비해서 저녁 7시에 여기로.” “응. 그럼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렇게 전해둘께.” 토오미는 내일 파티를 준비하려면 오늘 장을 봐 둬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릇하고 접시는 내가 준비해 올께. 내가 만들어 둔 게 있어.” “그럼 부탁할께, 카즈키군. 먼저 갈 테니까 내일 봐!” “응. 고마워, 토오미. 잘 가.” 카즈키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언덕을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토오미는 내일 생일파티가 엄청난 일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음 날, 그 날은 미나시로 소우시의 생일이었다. 카즈키는 일찍 퇴근해 집에서 테이블과 그릇들을 챙겨 그 언덕에 와 있었다. 토오미와 다른 사람들은 음식이 다 되는대로 가지고 오기로 했다. 카즈키는 준비를 마쳐놓고 늘 앉는 벤치에 앉아 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평화로운 타츠미야 섬의 늦은 오후가 지나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너무나도 기분이 좋았다. 소우시의 생일 날이기 때문일까? 그 때였다. 타츠미야 섬의 위장 표면을 뚫고 무언가가 날아오고 있었다. 설마, 페스툼? 5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 카즈키는 이를 악 물고 알비스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카즈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카즈키는 설마 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날아오고 있는 그것은, 자신이 그렇게도 그리워하고 기다리던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리고 더 이상 무엇을 생각할 틈도 없이 카즈키는 달리고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서. “소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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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227
제백이 2010 파프너 신 프로젝트를 제작한다고 해서 ㅠㅠ 드디어 우리 소우시가 돌아올지도 몰라 ㅠㅠ 너무 기뻐서 소우시 생일날 소우시가 돌아온다는 내용으로 써 봤음. 내가 그림연성러였다면 저 뒤를 대사 없이 컷으로만 연출하고 싶다. 카즈키와 소우시가 만나 서로 껴안는 컷, 뒤늦게 달려온 마야 등 사람들이 놀라는 컷, 기뻐하는 컷, 카즈키와 마야가 준비한 곳에서 소우시의 생일파티를 하는 컷, 그리고 마지막은 평화로운 타츠미야 섬 전경으로. 생일 축하해, 소우시!! 돌아온 것 축하해!!
타츠미야 섬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전과 같은 일상…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과 같은 마음으로 일상을 지낼 수는 없었다. 처음 며칠은 또 다시 페스툼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전과 같은 평화가 돌아왔지만,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또한. “카즈키군.” 토오미의 목소리가 들려 와, 카즈키는 뒤를 돌아보았다. “또 여기에 있었구나. 눈도 잘 안 보이면서…” “괜찮아.”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는 카즈키의 표정에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요즘 카즈키는 오전에 치료를 받고 오후부터는 계속 이 산의 정상에 앉아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오미는 카즈키의 옆에 앉아 입을 열었다. “있잖아, 카즈키군.” “응?” “미나시로군도 여기에 온 적이 있어.” “그래?” “응… 카즈키군이 본 걸 미나시로군도 보고 싶다고.” 카즈키가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그러니까 카즈키군. 미나시로군이 돌아와서 또 다시 카즈키군이 본 걸 보려면, 카즈키군의 눈이 빨리 나아야 한다고 생각해.” 카즈키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꽉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응.” 다음 날부터 카즈키는 눈의 치료에만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다. 소우시가 돌아왔을 때 그의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건 카즈키 자신이 싫었다.
----- 090816 카즈키는 돌아와서 소우시가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오곤 했던 언덕 위에서 그를 기다릴 것 같습니다. 그 곳에 앉아 기다리면서 한결같이 생각한건, 소우시에게 마음으로 외친 건 바로 '나는 여기에 있어'라는 말이 아닐까요. 자신은 여기에 있으니 빨리 자신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달라는... 또한 미래 일러스트에서 카즈키의 눈 색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기 때문에 아마 눈 치료에 매진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자신이 기다리는 곳으로 소우시가 돌아올 건데, 보이지 않는다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할 것 같아요.
카즈선배가 부실에 오지 않는다. 그라운드에도 오지 않는다. 나를 따로 부르러 교실로 오는 일도 없다. 마치, 처음부터 자신은 야구부와 관련이 없었다는 것 마냥. 알고 있다. 나는 카즈선배가 부실에, 그라운드에 오지 않는다는 것이 싫은 게 아니다. 카즈선배가 나를 보러 오지 않는다는 게 싫은 것이다. 나랑, 배터리였는데. 나는 선배의 투수였고, 선배는 나의 포수였는데. 이젠 배터리가 아니라고 해서, 나라는 사람은 모르는 것처럼 신경도 안 쓰는 건 너무하지 않나. 나는 이렇게… 나만, 이렇게. 선배는 이제 야구가 싫어진 걸까. 선배는 이제, 내가… 싫어진 걸까. 나는 카즈선배와 배터리를 짜서 행복했는데. 카즈선배와 야구를 해서 즐거웠는데. 선배는 아니었을까? 이것도 답은 이미 알고 있다. 아마도 카즈선배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야구부에 얼굴도 안 비추게 된 이유 같은 건 생각할 수 없었다. 선배는 왜 오지 않는걸까? 선배는 왜… 나를 보러 오지 않는걸까. 선배가 안 오면 내가 먼저 가면 되지! 하는 생각에 선배의 교실로 찾아간 적이 있다. 하지만 공부에 몰두해 있는 모습에, 차마 선배를 부를 수가 없었다. 내가 부르면 방해가 될 거 같아서. 게다가… 내가 불러서 선배가 “무슨 일이야?”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지? 선배가 보고 싶어서요, 라고? 그런 말을 들으면 선배는 어떤 얼굴을 할까… 생각하니 왠지 겁이 나서 공부하는 카즈선배의 모습만 바라보다 도망쳐 돌아왔다. 선배… 야구로 대학에 갈 생각이 아닌걸까. 그래서 저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거겠지? 선배가 더 이상 야구를 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선배와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을까. “선배… 카즈선배…” 말할 수 없는 마음은,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안에서만 맴돌고 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 괴롭다. 카즈선배가 없더라도, 카즈선배가 내 포수가 아니더라도, 나는 야구를 계속 해야만 하겠지. 나는 카즈선배의 투수니까. 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어야만 하겠지. 나는… 그것밖에 할 수 없으니까.
신지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어제 나기사의 도발에 넘어가서 한 내기에 졌기 때문이었다. 내기에서 이긴 나기사는 싱글싱글 웃으며 '진 사람은 하루동안 이긴 사람의 노예가 되는 거였지? 내일 10시 XX 놀이공원 앞에서 보자!' 라고 말하고는 휭 가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시각은, 10시 8분. "자기가 보자고 해 놓고 늦는 건 또 뭐야? 오기만 해 봐. 죽었어!" 화가 난 신지가 볼을 실룩거리며 투덜거렸다. 그냥 가 버릴까, 생각한 때에 마침 멀리서 나기사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바람결에 휘날리는 은빛 머리칼이 눈부시다. "나기사 너어-!!" 신지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신지 앞에 도착한 나기사는 숨을 몰아쉬며 힘들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됐어. 그보다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나기사의 숨이 진정되길 기다려 신지는 물었다. "준비가 늦어져서... 정말 미안해. 놀이공원 자유이용비는 내가 내 줄테니까." 흥, 하며 신지는 사과하는 나기사의 앞을 지나쳐 놀이공원 입구쪽으로 걸어갔다. "뭐해, 빨리 와, 나기사! 늦은 시간만큼 배상해야 할 거 아냐!" "응, 알았어!" 나기사는 씨익 웃으며 재빨리 신지의 옆으로 갔다. 둘만 타는 걸 신지는 그닥 좋아하지 않았지만,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노예가 되기로 한 약속이었잖아?'라고 말하며 볼을 부풀리는 나기사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같이 놀이기구를 탈 수밖에 없었다. "아, 재밌다. 신지군은 어때?" 패스트푸드 점에서 햄버거를 먹으면서 나기사가 물었다. "힘들어..." 신지는 넉 다운 상태. 그 모습을 보고 나기사는 소리 높여 웃었다. "하하, 신지군은 체력이 없구나. 약골이네." "시끄러워!" "그런 몸으로 에바 조종하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단 말이야." 신지는 아무 말 없이 콜라를 마셨다. "힘들지 않아? 에바 파일럿이라는 거." 이번에도 신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빨대만 자근자근 물어 씹었다. "사령관이랑도..." "왜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날카롭고 차가운 목소리로, 신지는 나기사의 말을 잘랐다. "아, 기분 상했어? 미안. 난 그냥... 네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어." 신지는 고개를 홱 돌리고 햄버거를 들어 우물우물 씹어먹었다. 나기사는 난처하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이제부턴 어떻게 할 건데?" "아, 어제 티켓 예매해 놨어. 클래식 연주회." 어제 그래서 일찍 가 버린 거구나. 이런 주도면밀한 녀석. 신지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도 나기사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음악은 인간이 발명한 것 중에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해. 그렇지 않아?" "응? 응… 나도 음악은 좋아하니까." 나기사는 매우 즐거워 보였다. 연주회에서 어느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하는 곡을 들으며, 신지는 음악 속에 몸을 맡긴 채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어땠어? 난 제법 좋았다고 생각하는데." "응, 괜찮았어. …중간에 조금 졸았지만." 신지의 대답에 이번에도 나기사는 소리 높여 웃었다. "벌써 밤이네. 신지군, 통금 시간 없지?" "여자애도 아니고... 없어. 또 어디 가려고?" "응, 잠깐. 저쪽 공원에." 나기사는 약간 높은 언덕에 있는 공원 쪽을 가리켰다. 이번엔 산책인가- 생각하며 신지는 나기사와 함께 공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 여기 좋다! 동네 경치도 한 눈에 보이네." "그렇지? 신지군하고 꼭 와 보고 싶었어." …그런 말만 안 하면 말이지. 신지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지군, 이 빛나는 도시를 신지군이 지키고 있는 거야." "……응." 자신을 위로해 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까 화가 나서 토라졌던 자신을. "신지군, 사실은 말이지." "응?" "난 신지군을 좋아해." "……또 농담할래?" "하하, 너무 화내지 마, 신지군. 난 에바에 타고 열심히 싸우는 신지군을 좋아해." "나기사…" "학교에서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신지군도 좋아해." "……." "내 말에 화내고 토라지는 신지군도 좋아해." 급기야 신지의 얼굴이 불타듯 화르륵 달아올랐다. 이 정도까지 붉어져서야, 나기사에게도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신지군의 옆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이, '나기사 카오루'가." 진심을 담아 그렇게 생각하고 소리내어 말했다. 그래, 이런 것을 '고백'이라 하는 것이리라. "나기사, 난…" 신지가 당황해하며 말하려고 했지만, 나기사는 그가 끝까지 말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잠깐! 어제 한 내기, 기억해?" "응.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의 노예가 된다... 잖아." "그럼 명령할께. '좋아해'라고 말해줘." "……." "약속은 약속이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싱긋 웃었다. 신지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기사… 조, 좋아해." "한 번 더." "…좋아해." "한 번 더." "좋아해." "한 번 더." "좋아해!" "한 번 더." "좋아한다구!" "한 번 더." "좋아한다니까!" "한 번 더." "좋아해, 나기사. …이제 그만 하면 안 돼?" 신지의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에 나기사는 웃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해 줘." "……좋아해, 나기사 카오루." 나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좋아, 그럼 이걸로 끝! 고마워, 신지군. 오늘 데이트랑, 방금 신지군의 말은 소중한 생일선물이라고 생각할께." "뭣…! 생일선물이라니?" "9월 13일. 나 오늘 생일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싱긋 웃었다. "미리 말을 하지…!" "괜찮아. 방금 그게, 나한테는 선물이었으니까." 정말로 정말로 소중한, 신지군하고의 추억. "생일 축하해, 나기사." "응, 고마워, 신지군. 자, 그럼 이제 돌아갈까?" 나기사의 말에 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는 바보 같기도 하고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역시 소중한 녀석이다. 하늘에는 별이 반짝반짝 빛나고, 밝은 만월이 떠 있었다. 아름다운 밤하늘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 아래에 너와 함께 있게 된 것에 감사해. 고마워, 태어나줘서.
----- 080913 카오루가 8번째 생일이라 신지한테 좋아한다는 말을 8번 듣게 써 봤음. 지금의 카오루만이 아니라 1살 때의 카오루, 2살 때의 카오루... 그 모든 카오루들한테 하는 '좋아해'라는 느낌을 전하고 싶었다. 허접하지만 결론은 축하한다는 뜻이야☆
"신지군, 신지군! '축하해'라고 말해줘!" 등교해 교실의 문을 열자마자, 나기사가 아침 인사도 하지 않고 뜬금없는 말을 하며 자신에게 달려왔다. "뭐야?" 아침부터 시끄러운 게 와서 귀찮다고 생각하며, 신지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유는 묻지 말고. 일단 축하한다고 해 줘. 응? 응?" "알았어…. 축하해, 나기사." 어리둥절했지만 나기사가 졸라댔기 때문에 신지는 부루퉁한 얼굴로 하는 수 없이 말해 주었다. "고마워, 신지군!" 하지만 나기사는 퉁명스러운 신지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매우 환한 얼굴로 미소지으며 고맙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 얼굴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신지 쪽이었다. "뭐… 뭐야? 오늘 무슨 날이야?" "응. 내 생일." "뭐?!" 담담하게 말하는 나기사의 말을 듣고 이번에는 신지를 포함한 신지네 반 아이들이 모두 놀랐다. "너… 오늘이 생일이야?" "응." "왜 미리 말 안 했어."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들어 신지는 엉뚱하게 나기사를 탓했다. "그냥, 놀래켜 주고 싶었어." "니 생일 날 니가 서프라이즈냐…" 정말 어쩔 수 없는 녀석이다. 신지는 활짝 웃고 있는 나기사를 따라 웃으며 생각했다. 오늘은… 좀 다정하게 대해 주도록 할까. "나기사 선배, 그럼 생일파티 해 드릴까요?" 신지네 반 여자아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니, 됐어. 신지군한테 축하받았으니까." 상큼하게 웃으며 단칼에 거절한 나기사의 말에 여자아이는 울먹이며 교실을 뛰쳐나갔다. "나- 기- 사아아아!!!" 아까껀 취소야!! 라고 외치며 얼굴이 빨개진 신지가 나기사를 퍽퍽 때리기 시작했고, 나기사는 맞으면서 뭐가 취손데? 생일 축하 취소는 안 돼!! 하면서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다음 해 생일도, 신지군하고 이렇게 즐겁게 보낼 수만 있다면… 좋을텐데.
"아, 기분 좋다-" 알렐루야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내 옆에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건물 안에서는 아직도 파티가 한창일텐데. "많이 마셨냐?" "으으응."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내 말에 부정의 뜻을 표했지만 역시 살짝 취해있는 것 같았다. "할렐루야…" 친근하게 나의 이름을 부르며 조심스럽게 나에게 기대어 오는 그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좀 더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좀 더, 살아주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와 똑같은 얼굴인데도, 전혀 다르다. 알렐루야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얼굴을 하고, 종종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고, 때로는 결단을 내리는 어른의 얼굴을 할 때도 있지만, 그 중의 대부분은 따스하고 환하게 웃는 얼굴인 것이다. 그래, 마치 태양과도 같이. 알렐루야 네가 나를 밝혀주는 태양이라면, 나는 너를 감춰주는 달인 거겠지. 달은 태양 빛을 흡수했다가 반사하는 거니까 태양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어. 내가 네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듯이. 난 네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어, 알렐루야. "알렐루야." 사랑하는 너의 이름을 불러본다. "응?" "반드시 살아남아야 해." "……" 너는 상냥하니까, 아마 내키지 않을 것이다. 너는 따뜻하니까, 상대방이 체온을 잃고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너는 착하니까, 다른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못 본 척 하기 힘들 것이다. 너는 솔직하니까, 동료를 배신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런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그런 건……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알렐루야 네가 살 수 없다. 네가 살 수 없으면 나도 살 수 없어. "남을 죽여서 네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 "할렐루야! 그건 싫…!" 말하려는 너의 입을 틀어 막았다. 나의 이 마음을 어떻게 하면 네가 이해해 줄까. 내 방식을 어떻게 하면 네가 수긍해 줄까. "싫다고 말하지 마. 싫어도 해야 해. 어린애가 아니잖아.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순 없어. 어리광 부리지 말고 현실을 봐!" 여전히 입은 나에게 틀어막힌 채, 유리구슬 같은 맑은 회색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본다. 순한 사슴같은 눈을 하고 있는 네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피로 물들여지지 않은, 더렵혀지지 않은 너를 사랑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너를 살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너를 잃지 않기 위해선, 싫다고 울면서 발버둥치며 달아나려는 너를 잡아다 끌어당겨 그 새하얀 손에 피를 발라줄 것이다. 뭐하면 내 피로 널 더럽혀도 좋아. 너만 살 수 있다면, 난 뭐든지 다 할 수 있으니까. 알렐루야 넌…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을 알아줄까? 난 네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데. "사랑해, 알렐루야…" 신음과도 같이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하려고 생각했던 말이 아니다. 아니, 나는, 그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니야. 방금 건 결코 말하지 않고 있다가 최후의 최후의 순간이 되어서야 말하려고 했던 거다. 지금 말할 생각이 아니었어.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은, 죽지 말라는 거였는데… "하, 할렐루야…" 당황해 너의 입을 막던 손에 힘이 풀렸다. 그 사이 너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며 내 이름을 불러온다. 아니야, 방금 그 말은… "응, 나도. 나도 너를 사랑해, 할렐루야. 그러니까… 너도 죽지 마." 너의 눈에 맺혀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네가, 나를 위해 울어주는 건가? 방금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준건가? 게다가… 나보고 죽지 말라고? 떨리는 손으로 너의 얼굴을 감싸쥔다. 사랑스러운, 너의 얼굴. 지금은 나를 위해 울고 있는 너의 얼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한다구. 사랑하고 있어. 알렐루야, 소중한 나의 반신, 너를. "같이 살아가자, 할렐루야…" 지금 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네가 울기 때문일 것이다. 나 때문에 우는 네가 너무 예뻐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준 네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같이 함께 살아가자고 말하는 네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게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는 걸 거야. 그래, 난 널 반사하는 달 같은 놈이니까, 네가 울어서 나도 따라우는 게 틀림없어. 우리 함께 찾아보자. 한 하늘 아래 달과 태양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그러니까 울지 마, 나의 태양.
----- 080831 본편에서 할렐루야가 알렐루야에게 원했던 답은 '난 살아갈거야'였겠죠. 그리고 거기에 '그러니까 너도 함께 살아가자'라고 말해줬다면 얼마나 기뻤을까요. 하지만 할렐이는 알렐이의 방어기제이기 때문에, 알렐이가 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순간 그 필요성이 없어지게 되기 때문에 결국 사라지게 되겠지만… 이중인격의 경우 대부분 그렇습니다만 본편에서야 그렇다쳐도 이건 2차 창작이니까요! 쌍둥이로 이분화한들 뭐 어떻습니까! 전 그냥 얘네 둘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ㅠㅠ 하지만 현시창 ㅠㅠ
개인적으로 2기 예고에서 '할렐루야가 없어졌어도, 그래도 여전히 난 마리를 구하고 싶어'가 아니라 '할렐루야도 없어졌고, 이제 나에게 남은 건 마리를 구하는 것 밖에 없어'라고 했으면 팬들을 분통 터뜨리면서 울게 하는 게 아니라 가슴 아파서 울게 할 수 있었을텐데… 팬들의 분노는 나의 힘! 뭐 이런건 아니겠지 쿠로미즈... 아님 알렐루야를 그렇게까지 찌질하게 만들고 싶었니?! 알렐아 할렐이한테 '죽지마. 함께 살아가자.'라고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웠니? 하긴, 어려웠으니 이렇게 된 거겠지만 ㅠㅠ 할렐아 죽지 마 ㅠㅠ 너 없으면 알렐이는 어떻게 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