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울고 있었다. 그제서야 처음으로 입을 열어 그의 이름을 부른다. "나루호도?"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조급해진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왜 그래?" 그는 여전히 울고 있다. "나, 괜한 짓을 한 거 같아서... 사실 나 같은 거, 너에게 전혀 위안이 되지 않잖아." 나의 구원자, 그가 울고 있다. "나, 널 구해주기는 커녕 널 더 괴롭게 만든 거잖아." 나의 구원자, 그가 고백하고 있다. 나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른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애써 부인해 왔던 사실을 인정한다. 그가 나를 위해 그랬다는 것을 안다. 그가 나를 구하려고 했다는 것을 안다. 진실은 밝혀졌다. 그는 나를 구원했을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괴로운 것인가.
나루호도 류이치. 쿄야에게 있어서 그는 대하기 어려운 상대 중 하나였다. 자신과 나이 차가 제법 난다는 사실도 원인이겠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이 그를 파멸의 길로 밀어 넣었다는 것. 그 죄책감이 그를 대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앞에 서면 자신은 죄인이 되어버렸다. 범죄자를 추궁해야 하는 자신이 그 입장이 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도 사람이 좋았다. 그를 그렇게 만든 자신에게 원망의 말 한 마디, 원망의 시선을 보내는 일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수긍하고 받아들인 평온함이 그 눈 속에 깊이 있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다. 차라리 그가 자신을 탓해 주길 바랐다. 화내며 자신을 원망해주길 바랐다. 그리고 자신을 용서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원망하지 않았기에 자신도 용서받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자신은 그를 볼 때마다 이렇게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속죄해야만 하겠지. 형의 몫까지 대신해서 그의 7년을 보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그것도 그가 허락해 줄 때에야 가능한 일이지만.
모든 것이 해결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쿄야는 그가 자신의 상사인 검찰총장과 동행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가 현역 시절일 때 라이벌이었다고 하는 검사다.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뒤를 쫓았다. 검찰총장을 향해 환히 웃는 그는 행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다 끝났어. 변호사 나루호도 류이치의 죽음도 이것으로 모두……” 속 시원해 보이는 그에게 검찰총장은 굳은 얼굴로 잘라 말했다. “전에 말했을 텐데. 약한 소리는 들어주지 않겠다고.” “에이, 너무 그러지 마. 모든 게 다 해결됐다고 말하고 싶은 것 뿐이야.” 검찰총장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물었다. “그래서, 이젠 뭘 할 건가?” “뭘 하다니? 피아노 치는 것 밖에 더 있나?” 장난스러운 그의 대답에 검찰총장은 얼굴을 구기면서 말했다. 무표정한 얼굴에 인상을 쓰니 꽤 무서워 보이기도 한다. “진지하게 하는 말이다.” “음… 일단 배심원 제도가 좀 굳어지면, 다시 사법고시를 볼까 해. 아, 이번에는 검사에 도전해 볼까?” “시끄럽군. 네 녀석한테는 변호사가 딱이다.” 나루호도씨가 검사라…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쿄야는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야, 그렇게 단칼에 잘라 말하지 않아도… 아, 가류 검사.” 이크, 자신을 눈치챈 모양이다. 쿄야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미소를 띠우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나루호도씨. 그리고 미츠루기 검찰총장님.” “안녕하시오.” “이쪽엔 무슨 일입니까? 사건인가요?” “아뇨,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다음에 또 봐요.” 그는 웃으며 손을 흔들고 검찰총장과 함께 자신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태도에 왠지 모르게 화가 난다. 당신은 왜 나를 원망하지 않지? 당신은 왜 나를 용서해주지 않지?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지? 난 이렇게 괴로운데. 제발 말해줘. 어떻게 하면 내가…… “나, 나루호도씨!” 다급한 목소리로 부르자 그가 뒤돌아본다. 그의 옆에 있던 검찰총장도 덩달아 돌아보았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저기…… 그…… 나루호도씨는……” 지금, 행복합니까? 지금, 만족합니까? 내가, 형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걸 내가 물어본다면 뻔뻔스러울까. 행복하지 않다고, 만족하지 않는다고, 나의 7년을 어떻게 보상해줄 거냐고 따지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온갖 생각이 머리 속을 헤집었다. 그 때 그가 입을 열었다. “…됐어요, 가류 검사.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는 없었던 일로 해 주려는 것일까. 아니면 친우인 검찰총장 앞에서 자신의 치부라고도 할 수 있는 과거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가 자신이 물어보고 싶었던 것을 이해해 준다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준다면…… 언젠가는, 언젠가는 자신과 형의 죄를 모두 속죄하고 그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 자신의 이 마음의 죄를 벗어버릴 날이 오리라. 자애롭게 웃고 있는 그에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화답의 미소를 지어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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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220 아마도 작년 겨울쯤에 쓴 글. 솔직히 가류 형제한테는 애정이 별로 없어서 쿄야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릴 거란 생각으로 출발했습니다만... 나루호도는 아마 지금에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해 하고 있겠죠. 그리고 이미 모든 것을 용서했을 겁니다. 그것을 쿄야는 당연히 알 리가 없고, 그것을 눈치 챈 나루호도는 쿄야를 조금 안쓰럽게 생각할 것 같아요. 혹여 아직 가류 형제가 한 짓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쿄야에 대해서만은 살짝 불쌍하다고 여기고 있지 않을까요. 그가 어려서든 어리석어서든. 그저 지금은 자애로운 얼굴로 쿄야에게 웃어주는 걸로 끝을 내고 싶네요. 그리고 중간에 뜬금없이 미츠루기가 나오는건 진심으로 행복해 보이는 나루호도와 함께 있는 상대가 미츠루기인 것에 대한 쿄야의 질투와 그런 쿄야를 여유롭게 견제하는 미츠루기의 모습이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결국은 그냥 미수로 끝났지만. 다음에 이 세 사람의 이야기를 또 쓴다면 그 때는 쿄야와 미츠루기의 관계도 써 보고 싶어요.
길을 걷다 어느 가게에선가 징글벨이 들려왔다. 벌써 캐롤을 트는 건가. 빠르네, 라고 생각하던 나루호도는, 크리스마스가 이제 2주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요 며칠 일이 계속 겹쳐서 생기는 바람에 날짜 감각이 없었던 것이다. 마요이에게 보낼 선물을 사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곧 나루호도의 생각을 가득 메운 것은 한 남자였다. 단 하나의 친우. 야하리와는 다른 관계의…… 친우? 나루호도는 거기에서 살짝 머뭇거렸다. 몸이 아니라, 생각이 주저하고 있었다. 뭔가 이 이상 깊이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루호도는 사무실까지 뛰어가면서 생각을 털어버리기로 했다. 확실히 요 며칠 사이에 날이 많이 추워져서, 뛰는 동안 차가운 공기에 숨이 턱턱 막혔다. 나루호도는 결국 뛰는 걸 멈추고 숨을 몰아 쉬면서 입을 틀어막았다. 이 이상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간 폐까지 얼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건조한 공기에 목이 아파 와 나루호도는 빨리 사무실로 돌아가 뜨거운 차를 마시고 싶었다. 그가 타 줬던 씁쓸한 맛의 붉은 색 차가 떠올랐다. 이제 두 번 다시는 마실 일이 없을 것이다……. 나루호도는 자꾸 그의 생각만 하고 있는 자신이 짜증났다. 그래서 나루호도는 사무실로 돌아가지 않고 술을 마시러 가기로 했다. 그에 대한 상념을 술의 힘을 빌려 툭툭 털어버리고 싶었다. 그를 잊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그가 보고 싶었다. 그가 돌아와서 자신이 필요하다고 얘기해주길 바랐다. 자신이 잘못한 일이 아니라고. 자신으로 인해 구원받았다고, 고맙다고, 그렇게 말해주길 바랐다. 결국 나루호도는 술도 마시기 전에 그의 생각으로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대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열흘이 흘렀다. 크리스마스가 벌써 다음 주로 다가와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슬쩍 보니 크리스마스 카드를 진열해 놓고 있었다. 문득 자신도 그에게 카드를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변호사가 되기 전에는 그에게 편지를 자주 보냈었다. 한 번도 답장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읽기는 했었을까. 내가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그에게 제대로 닿았었을까. 나루호도는 그에게 어울릴만한 빨간 카드를 골라 그를 생각하며 카드를 썼다. 왜 떠났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그렇게 묻고 싶은 건 다 빼 놓고, 지금 그에게 정말로 하고 싶은 단 한 마디를 썼다. 「보고 싶다, 미츠루기」 그 말을 쓰는 순간, 결국 그에게는 도착하지 않을 카드 위로 눈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언제나 자신의 말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예전에도, 지금도. 언제나 자신만이 그를 뒤쫓았다. 어째서? 왜 항상 나만?
나루호도는 책상에 엎드려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아낸 뒤, 잔뜩 부은 눈으로 멍하니 카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젠 자신이 먼저 잊자고. 처음부터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그런 사람은 이미 죽어서 없는 것으로 하자고. 이제 자신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울지 말자, 나루호도. 앞으로도 혼자 해 나가야 하잖아. 모든 걸 다 잊고, 마음 독하게 먹고 혼자 살아가자. 그래야만 해, 나루호도 류이치.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타이른 나루호도는, 굳은 결의를 한 얼굴로 책상 위의 카드를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자신의 마음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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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220 앞 부분은 실화. 12월 초에 벌써 캐롤을 트는 집이 있더라구요. 그 때까지 무자각이었는데 곧 크리스마스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제 다음 주네요... 나루호도 미안 ㅠㅠ 크리스마스에 행복하게 미츠루기랑 지내는 걸 쓰고 싶었는데 왜 이렇게 됐을까 ㅠㅠ
어느 날 새벽,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한창 곤히 자고 있을 때 깨워지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츠루기는 불쾌한 심정을 목소리에 드러내며 전화를 받았다. "누군가?" "미, 미츠루기!!! 큰일이야!!! 나, 나루호도가...!!!" "뭐?!" 야하리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루호도한테 또 무슨 일이 생긴건가?! "어쨌든 빨리 돌아와!!!"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어지고, 불안한 마음이 된 미츠루기는 재빨리 허둥지둥 나갈 채비를 했다.
"야하리, 무슨 일인가!" "아, 미츠루기 검사님..." 야하리의 옆에는 나루호도의 조수, 마요이양이 있었다. 근심스러운 얼굴. 정말 무슨 일이 있는건가? "나루호도가 큰 사고를 당해서... 지금 중환자실이야." "아직 혼수상태예요." 두 사람의 말에 미츠루기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이 해외에 나가 있는 사이에, 이 녀석은 또 사고를 당한 것이다. "면회는?" "아직 안 된대. 조금 더 안정이 되어야..." 한숨을 내쉬고 싶었지만, 어느새 마요이양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는 것을 눈치채고 미츠루기는 자신을 타일렀다. "걱정말게, 마요이양. 저 녀석의 일이니까, 금방 툭툭 털고 일어날거야." "그, 그렇겠죠? 감사합니다, 검사님." 역시 강한 아이다. 미츠루기는 그녀에게 마주 웃어주었다. 이틀 후 나루호도는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상태는 어느 정도 호전되었지만, 아직 혼수상태인 채로. 나루호도의 안정을 위해 독실로 한 것은 미츠루기의 배려였다. "왜 아직도 혼수상태인 겁니까?" "정확한 이유는 저희 쪽에서도 아직 파악이 안 되고 있습니다. 며칠 더 지나봐야……" 의사의 말에 미츠루기는 불안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루호도가 있는 병실로 돌아가자, 야하리와 이토노코기리 형사가 사다 놓은 병문안 과일들이 놓여져 있었다. "아, 미츠루기 검사님 오셨슴까." "자네는 왜 여기 있나?" "나루호도씨 사고 소식을 받고 출동한게 저라서 그렇슴다." "아아..." 아직 잠들어 있는 나루호도의 옆에서 이토노코기리 형사에게 자세한 사고의 내용을 들었다. 꽤나 큰 사고였다. 자칫 죽을 수도 있었던. 그래도 이렇게 무사히, 살아있지 않은가. 괜찮다. 며칠 더 지나면 분명 정신을 차리겠지. 절벽에서 떨어지고도 죽지 않았던 녀석이다. 미츠루기는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며 불안함을 지우기 위해 애쓰며 성심성의껏 나루호도를 간병했다. 예감은 적중했다. 며칠 후, 나루호도는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떴던 것이다. "나, 나루호도!!!" "나루호도군!!!" "정신이 드는가, 나루호도!!!" "몸은 좀 어떻슴까?!"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향해 집중되는 질문공세에 나루호도는 매우 당황해했다. "뭐, 뭐야... 나, 병원인건가?" "응. 나루호도군 사고를 당해서, 여기로 실려왔어." "다행임다! 정말 다행임다!" "며칠째 혼수상태여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 자식아!" 나루호도가 정신을 차리자 모두의 얼굴에 기쁨이 떠올랐다. 근심스러웠던 얼굴과 한숨은 어디론가 다 날아가 버렸다. 미츠루기도 기뻐서 들뜨는 자신을 겨우 억누르고, 나루호도에게 축하의 인사말을 건넸다. "정신이 들어서 정말 다행이네, 나루호도." 그런데 나루호도의 태도가 뭔가 이상했다. "아, 저기... 정말 죄송한데, 누구세요?" 그의 말에 눈 앞이 새하얘지는 듯한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 나루호도군, 무슨 말이야... 미츠루기 검사님이잖아." "너 장난하는 거지, 나루호도!! 하하하." "그러게 말임다. 그런 장난은 치는 게 아님다, 나루호도씨." 야하리와 이토노코기리 형사는 큰 소리로 웃었다. "아니, 정말 모르겠는데... 내가 아는 분이야?" "...나루호도군..." "...어이, 나루호도! 너, 정말...?" "장난도 정도껏 하십쇼, 나루호도씨!" 되려 이토노코기리 형사가 화를 냈다. 마요이양과 야하리는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였다. "...나루, 호도..." 나루호도가 불안한 눈길로 자신을 올려다 보았다. 그 눈동자는, 커다랗고 올곧은 그의 눈동자에는, 장난 같은 것은 들어있지 않았다. 생판 남을 보는 듯한 의문과 경계심이 화살과도 같이 자신에게 날아와 꽂혀 있었다. "난, 저기... 그, 이만 돌아가겠네." 그의 눈동자 앞에 미츠루기는 버티지 못하고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갔다.
"미츠루기, 그러지 말고 다시 한번 나루호도한테 가 봐. 장난하는 거잖아." 다음 날, 야하리의 손에 억지로 끌려 가면서 미츠루기는 그의 눈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야하리의 말이 맞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척하면서 같이 병원에 온 것이었다. "나루호도, 나 왔다! 미츠루기도 같이 왔어." 나루호도의 옆에는 마요이양이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검사님 오셨어요." 마요이양이 일어나 공손히 인사하며 자리를 비켰다. "뭐해, 미츠루기." 야하리가 옆구리를 쿡 찔러,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열었다. "자... 잘 잤는가, 나루호도." "아, 어제 오셨던..." 나루호도는 경계심으로 몸을 살짝 움츠리고는, 어색하게 미츠루기를 향해 인사를 했다. "이 녀석이 아직도 그러네. 미츠루기한테 그렇게 화났냐?" 야하리가 덤벼들어 나루호도의 목을 가볍게 졸랐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야하리..." 그러면서 자신을 흘낏 올려다본다. 여전히 의문과 경계심과 혼란이 담겨 있는 눈. "뭐야, 너 정말 미츠루기 기억 안 나?" "미츠...루기? 저 사람 이름이야?"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 물었다. 분노와 허탈감과 절망이 미츠루기의 가슴을 휩쓸었다. "나 정말 모르겠는데..." 그 말에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줄이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과 동시에, 미츠루기는 나루호도에게 달려들었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그의 멱살을 쥐어잡고, 세게 흔들면서, 미츠루기는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장난하지 마, 나루호도!!! 네가 어떻게 날 몰라!!!" "꺄악, 검사님!!!" "미츠루기, 이러지 마!!! 나루호도는 환자야!!!" "나루호도 네가, 네가 어떻게 날!!!" 미츠루기에게 멱살을 잡혀 흔들리면서, 나루호도의 눈에는 공포가 어렸다. 그리고 그 눈을, 미츠루기는 똑똑히 보았다. 미츠루기의 노성에 깜짝 놀라 재빨리 달려온 이토노코기리 형사와 야하리가 억지로 그를 나루호도에게서 떼어놓았다. "좀 진정해, 미츠루기. 네가 그러면 어떡해." 마요이양은 놀라서 상태가 나빠진 나루호도를 간병하고 있었다. "일단 차근차근 나루호도씨와 이야기해 보는 것이 어떻슴까?" 이토노코기리 형사의 말에 동의해, 모두는 나루호도가 진정되고 난 뒤 이야기를 해 보기로 했다.
"나루호도군, 나 기억나?" "응, 마요이잖아." "나는?" "야하리." "전 기억하고 있슴까?" "이토노코 형사." "그럼 나루호도군, 미츠루기 검사님은...?" "……." 마요이양의 질문에 나루호도는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내려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대답하지 않아도, 분명한 부정이었다. "너 어디까지 기억 나는거야?" "난 분명 의뢰인의 부탁으로 조사하러 나가다가..." "변호사인건 기억 나는거네?" 나루호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미츠루기를 기억 못 해? 너 라이벌이었잖아." "라이벌? 나랑 저 사람이?" "나루호도군이 미츠루기 검사님을 변호해서, 이긴 적도 있잖아!" 마요이양이 그 때를 회상하며 웃는 얼굴로 나루호도에게 동의를 구했다. "내, 내가? 라이벌이라면서 변호를 했다고?" 나루호도의 말에 이번에는 미츠루기가 상처를 입어, 시선을 내려 자신의 주먹쥔 손을 내려다 보았다. 저 녀석의 입으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자신이 나루호도를 적이라 생각하고, 그런 적에게서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을 때 화를 냈던 녀석이... 그런 네가, 나를... "나루호도군 분명, 미츠루기 검사님 때문에 변호사가 됐다고..." "...어? 내가?" 나루호도는 당황해하며 생각에 잠겼다. "어... 나 왜 변호사를 하려고 했더라...?" 미츠루기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려는 것을 참기 위해 이를 악 물고, 그대로 도망가듯이 병실을 나가버렸다. "야, 미츠루기!!!" 야하리가 미츠루기를 잡기 위해 나갔지만, 미츠루기는 벌써 저멀리 복도 끝에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야하리는 자리로 돌아왔다. "너, 어릴 때 학급재판, 기억나?" "응. 네 녀석이 급식비를 가져가는 바람에 내가 범인으로 몰렸었지. 그 때 구해준 것도 너고." "...정확히는 내가 구한 건 아닌데..." 야하리는 난처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난 네 변호를 거들긴 했지만, 널 구한 건 내가 아니야. 미츠루기라고. 정말 기억 안 나?" "……." 나루호도의 침묵에 세 사람은 모두 난처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래서, 이유는 뭔가요?" "사고의 영향이라고 판단됩니다. 이쪽 뇌에 충격을 받아서……" 설명을 하는 의사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츠루기는 멍하니 나루호도의 뇌 사진을 보고 있었다. "저,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 녀석만 기억을 하지 못할까요?" 야하리가 조심스럽게 미츠루기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게... 확언은 할 수 없습니다만..." 의사도 야하리를 따라 미츠루기를 힐끔 바라보았다. "사고를 당하기 직전에 어떤 사람을 잊었으면 좋겠다고 강하게 바라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개인적인 저의 소견입니다만, 기억은 어떤 작은 계기를 통해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너무 낙담하지 마시고 환자와 많이 이야기를 나눠보세요." 의사의 말을 듣고 나와서도 미츠루기는 낙담한 자신을 추스려 일으킬 수가 없었다. 나루호도가 자신을, 자신만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크나큰 충격이었다. "자자, 미츠루기. 너무 그러지 말고. 많이 이야기를 나눠 보라잖아? 병실로 가자." 야하리와 함께 병실로 갔지만, 나루호도의 태도는 여전했다. "아, 저기, 오셨...어요." 이건 명백한 공포와 거리감. 미츠루기는 자신을 타일렀다. 참자, 참자, 참자. "그럼 우린 나갈 테니까, 둘이 잘 이야기 해봐. 지난 번처럼 또 화내지 말구, 미츠루기." "아아." 나루호도는 불안한 눈으로 나가는 야하리와 마요이의 등을 보았다. 한동안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솔직히 말해 미츠루기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을 모른다는데. 자신이 기억나지 않는다는데.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해야 좋을지? "저기..." 그 때 나루호도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 작은 사실에도 기뻐 날뛰려는 자신을 억누른 채, 미츠루기는 나루호도를 바라보았다. "뭐, 뭔가?" "학급재판 때... 날 구해줬다는 게... 정말 당신이에요?" 아아, 그 때의 일인가... 미츠루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한 번 절망했다. 그 때의 일마저, 이 녀석은 잊어버린 거로구나... "일단,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어서..." "―어째서 넌,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지?" 나루호도의 말을 자르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건 저도 잘..."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 녀석의, 마치 남을 보는 듯한 저 눈이 싫었다. 자신을 잊고 싶어했을 거라는 의사의 말이 생각나서 더 싫었다. 넌, 네 녀석은, 그렇게 날 잊어버리고 싶었던 거냐!!! "어째서 날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미츠루기는 벌떡 일어나 또 다시 나루호도를 붙잡았다. 미칠듯한 분노가 미츠루기의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저, 저도 몰라요, 이거 놓으..." 나루호도는 공포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미츠루기를 올려다 보았다. 이윽고 그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도, 저도 모르는데... 제가 당신 때문에 변호사가 되었다고 들어도... 저도 모르는데!!!" 이번에는 나루호도가 소리를 질렀다. 그의 눈물에 왠지 허탈해져, 가슴이 먹먹해진 미츠루기가 그를 놓았다. 이봐, 울고 싶은 건 이쪽이라고. "당신은 도대체 뭐예요? 당신이 누구길래 나한테 이러는 거냐구요... 으아앙―" 급기야 나루호도는 젊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미츠루기는, 그 때 그의 바보같은 이 울음이 싫었었다. 그리고 지금도 싫다. 울지 마! 네가 우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미츠루기..." 야하리가 들어와 미츠루기를 끌어냈다. 그의 책망하는 듯한 눈빛에 미츠루기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마요이양이 우는 나루호도를 달래고 있었다. "괜찮아, 나루호도군. 미츠루기 검사님은 나쁜 분이 아니야, 너무 울지 마... 응?" "이젠 싫어! 나라고 기억하기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닌데... 왜 나한테 그러냔 말이야! 무서워..." 나루호도가 울며 내뱉은 말은 얼음 송곳이 되어 미츠루기의 가슴을 찢었다. 자신은 이제 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만 건가. 미츠루기는 헛웃음을 흘리고 쓸쓸한 눈빛으로 나루호도를 바라보다, 야하리의 팔에 이끌려 병실을 뒤로 했다.
"상태가 좀, 악화된 모양이에요... 퇴원이 연기됐어요." 마요이양의 말에 조금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곧 괜찮아질 테니까 너무 걱정마세요! 분명 검사님도 기억나게 될 거에요." 자신을 위로하려 애쓰는 것이 느껴져, 자신도 괜찮은 척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미츠루기의 마음 속에는 한없는 절망이 입을 벌린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런 나루호도를 두고 다시 외국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다시 한 번 병원을 찾아갔더니, 이번에는 대놓고 무섭다고 말하며 둘만 남겨놓지 말라고 야하리와 마요이양에게 부탁까지 할 정도였다. 자업자득이라면 자업자득일지도... 그렇게 생각하며 미츠루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옆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서 잠에서 깼다. 어두운 병실 내에서, 누군가 자신의 옆에 서 있었다. "누, 누구....?"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긴장으로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나루호도, 넌 왜..." 그 사람이다! 미츠루기 검사인가 뭔가 하는 그 사람! 나루호도는 무서웠다. 간호사를 부르려고 벨을 누르려는 나루호도의 손을 재빨리 잡아 채 누르면서, 미츠루기는 원망의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넌 왜 날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그의 한숨에 술냄새가 섞여 나왔다. 이 무서운 사람이 술까지 마셨다니, 나루호도는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이, 이것 놓으세요..." 공포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나루호도는 작게 저항했다. "내가, 그렇게 미웠던 건가? 나만, 잊어버릴 정도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에게 잡힌 손이 아플 뿐이었다. "왜 나만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나루호도..." 그래, 확실히 나루호도는 다른 사람은, 다른 일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미츠루기라는 이 사람만, 이 사람의 일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자네가 어떻게 날 잊을 수 있나, 나루호도!!!" 또 다시 그가 화를 냈다. 이번에는 야하리도, 마요이도 없고, 간호사를 부를 수도 없다. 절체절명의 공포에 빠져 나루호도는 벌벌 떨었다. 한심하게도 공포로 눈물까지 흘러나왔다. "무, 무서워..." 나루호도의 한 마디에 미츠루기는 폭발하듯 화를 냈다. "왜, 왜!!! 왜 나만 기억하는 못하는 건가!!!" 나도 몰라, 모른다고!!!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나루호도는 그저 떨고만 있었다. "왜... 왜..." 화를 내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수그리더니,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 나왔다. 뭐, 뭐야, 설마 우는 건가? "정말... 정말 기억 못 하는 건가? 나루호도." "으응..." 나루호도는 덜덜 떨며 작게 수긍했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두운 병실 안에서, 자신의 손을 꼭 잡은 채 울고 있는 그의 눈물만이 반짝반짝 빛났다. "아, 아니, 저기..." "...미안하다. 하지만..." 나루호도는 당황한 채 자신의 앞에서 우는 남자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자네가 날... 잊다니..." 나루호도는 미츠루기 가슴 속의 절망을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지금도 미츠루기가 이러다 돌변해서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 떨고 있을 뿐이다. 그의 모습에 미츠루기는 또 다시 상처를 받고, 더더욱 눈물을 흘렸다. "나는 자네에게, 그저 잊고 싶을 뿐인 존재인 건가?" 자신도 모른다. 사고를 당하기 전의 자신이 어땠는가를, 자신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만 윽박질렀으면 좋겠다. 그만 화냈으면 좋겠다. 그만…… 울었으면 좋겠다. "우, 울지 마, 미츠...루기."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미츠루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기억이 난 건가, 나루호도!!!" "아, 아니... 이러면 위로가 좀 될까, 해서요..." 미츠루기의 눈에 불꽃이 파팟, 하고 튄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나루호도는 격분한 그에게 멱살을 붙잡혀 벽에 쾅 하고 머리를 부딪혔다. "자네는 날 뭘로 보는 건가? 지금 나하고 장난하자는 건가!!!" 그, 그게 아닌데... 아파... 무서워... 나루호도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미츠루기 넌… …환자인데… …사과……" 뭔가 낮은 목소리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나루호도는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나루호도! 정신이 들어? 이 녀석이 난폭하게 대했다며?" "아..." 야하리가 "사과하라니까!"라며 옆구리를 쿡 찌르자, 미츠루기가 주저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어, 어제는 미안했다, 나루호도. 다신… 난폭하게 대하지 않겠다." "그래, 두 번 다시 그러지 마, 미츠루기." "음, 미안하다. …어?" 사과를 하던 미츠루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루호도는 어제 벽에 부딪힌 머리를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덕분에 기억이 났다! 이런 난폭한 방법을 쓰다니……" "나루호도...!" 미츠루기의 눈에 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앗, 너 또 울지 마! 네가 울면 이쪽이 당황스럽단 말이야." "뭐야, 어제 울었었냐? 미츠루기." 야하리가 놀리자 미츠루기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변했다. "이, 이의있다!!! 그러는 너야말로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지 않은가!!!" "그거야 네가... 그게 내 잘못이냐!!!" "으하하, 니네는 어떻게 변한 게 하나도 없냐! 으하하하." 야하리가 큰 소리로 웃자 나루호도와 미츠루기가 동시에 야하리를 노려보며 소리질렀다. "시끄러워, 야하리. 그러는 네녀석은?" "시끄럽다, 야하리. 어제 네녀석이랑 술을 마셔서 그렇지 않은가!" 역시 사건의 뒤에는 야하리. 세 사람은 동시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다시는 서로가 서로를 잊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하고 빌었다.
미츠루기는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해외로 법정연구를 하러 나가 있는 몇 년 사이에, 나루호도가 증거품 위조로 변호사직을 박탈당했다니! 뒤늦게야 그의 소식을 듣고 귀국했지만 자신이 손 쓸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자신이 귀국했을 때, 나루호도는 이미 변호사 뱃지를 반납하고 변호사 사무실을 닫은 후였다. 나루호도가 증거품 위조라니,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처분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해도 정작 그 본인이 없어서야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나루호도는 변호사 사무실을 닫고 나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디로, 어디로 간 거냐, 나루호도. 미츠루기는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읊조렸다. 마요이, 마요이 군은 어디에 있지? 그녀라면 알고 있을 터다. 잠깐, 난 그녀의 연락처를 모른다. 이토노코기리 형사에게 시켜야겠군. …이토노코기리 형사는 어디 갔지? 모두, 어디로? 어디로 사라진 거지? 내가 해외에 있는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왜! 왜 아무도 없는 거지? 어째서 모두 사라진 거야!! 미츠루기는 굳게 닫힌 나루호도 법률사무소의 문을 쾅 하고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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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205
이 당시엔 미츠루기 검사국장 설도 없었던 때라, 그저 절망적인 심정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캡콤은 역재 5에서 7년간 미츠루기가 뭘 했는지 입증할 것을 요구합니다!!
7년 전, 내가 변호사 지위를 박탈 당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미츠루기 레이지 바로 너였다. 내가 변호사가 될 수 있게 해 준 건 다름 아닌 너였으니까. 나를 구해준 너를 다시 한번 만나기 위해. 그리고 다시 한번 만나 내 힘이 되는대로 너를 돕기 위해. 그래서 변호사가 되었다. 그래서 너와 또 다시 만났다. 하지만 너를 돕기 위한 나의 노력은 너를 구하긴 했지만 너를 더더욱 상처입혀 버렸고, 그리고 너는 떠났다. 네가 없는 동안 내가 변호사 지위를 박탈당했다는 걸 들으면, 넌 어떤 반응을 보일까? 화낼까? 한심해할까? 난 이제 더 이상 변호사가 아닌데. 네가 또 다시 위기에 빠지면 어떻게 돕지? …이젠 내가 돕지 않아도 괜찮나. 너에겐 이제 많은 이해자와 조력자가 생겼으니, 난 없어도 되는 거겠지. 내가 변호사 지위를 박탈당하는 건, 이제 내가 널 도울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인지도 몰라.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미츠루기 널 도울 수 있었으니까, 이제 됐어. 네가 위기일 때 널 구해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나는 변호사가 되길 잘 했다고 생각하니까, 이제 괜찮아. 미츠루기 널 돕고 싶어서 하게 된 변호사 일이지만, 많은 사건과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난 소중한 것을 많이 배웠어. 그걸 잊어버리지 않으면, 분명 난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미츠루기, 너도 행복하게 잘 살아갔으면 해. 난 이제 변호사가… 변호사가 아니지만……
"이봐, 나루호도! 그만 일어나게."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뭐야, 꿈이었던 건가. "자면서 울다니, 어떻게 된 건가?" 눈 앞에는 무심한 듯 묻지만 걱정스러운 표정의 미츠루기가 있었다. "아무 것도 아냐." "또 그 놈의 '아무 것도 아냐'인가, 자네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면 말해 보지 그러나." "그냥, 옛날 꿈을 꿔서… 그래서 눈물이 났을 뿐이야." 미츠루기가 내민 프릴 달린 손수건으로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응, 옛날 꿈…" "자네, 괜찮은 건가?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다만." "아냐, 깼어. 이젠 정말 괜찮아. 고마워." 괜찮다면 됐네, 라고 말하면서 미츠루기는 벗었던 안경을 다시 쓰고 서류를 들여다 본다. 이젠 명실상부 검찰청 톱인, 검찰총장의 모습이다. 네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새삼스레 즐거워져서, 서류를 읽는 그 얼굴을 올려다보며 애교 부리듯 물었다. "미츠루기. 피아노 쳐 줄까?" "거절하겠다. 자네의 괴악한 피아노 연주로 일을 방해받고 싶지는 않군. 자네는 지금 내가 부탁한 배심원 선정 일은 다 해 놓고 이러는 건가?" "아… 무, 물론이지! 하하하." 사실은 반쯤 잊고 있었지만. 미츠루기는 내 얼굴을 흘낏 보더니 한숨을 내쉰다. "그 얼굴, 잊고 있었다는 표정이로군. 빨리 가서 일하지 못하겠나!" "으아아, 알았어, 알았다구!" 그래, 난 지금 '검찰총장 미츠루기 레이지'의 의뢰를 받고 아직 시험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배심원 제도의 배심원단을 선정하고 있다. 이제 나는 변호사가 아니지만 그래도 계속 너를 도울 수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난 만족해. 내가 변호사를 그만두게 된 건 분명 이렇게 너를 도우라는 뜻일 거야. 변호사를 그만 두고 나서, 많은 사건과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난 또 소중한 것을 많이 배웠어. 덕분에 지난 7년 간의 일이 모두 괴롭지만은 않게 됐어. 변호사를 그만두게 된 건… 조금 유감이긴 하지만, 그렇게 된 걸 후회하지도 않아. 지난 7년 간의 일이 있었기에, 그 때와는 또 다른 지금의 내가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난 괜찮아. 난 또 웃을 수 있어.
----- 080828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우리 나루호도. 처음엔 많이 울기도 하고 괴로웠겠지만, 지금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나루호도라면 절대 꺾이지 않고 앞을 향해 나아갈 테니까.
하지만 나루호도야. 난 네가 변호사를 그만두게 만든 사람들이 너무 원망스럽다. 그래도 웃는 널 보니 눈물이 나는구나 ㅠㅠ 에구 이 장한 것… 사랑한다!
"미츠루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상냥하게 물어오는 너에게는 거짓말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미 너무나 오랫동안 누군가를 믿는 일을 하지 않아왔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사실은 나도 믿고 싶다. 사람을, 믿고 싶다. 하지만 검사인 미츠루기 레이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눈 앞에 있는 사람을 의심하는 것 뿐이어서. 그렇기에 나는 눈 앞에 있는 너에게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거겠지. 이런 나를, 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불쌍하다며 동정하고 있을까? 나도 모르게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 말았다. 눈치 빠른 너는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살피며 묻는다. "미츠루기… 역시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왜 그렇게 생각하지?" "왜긴… 네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오히려 네 쪽이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오늘 심리, 뭐가 잘못되기라도 했어?" "아니. 오늘도 승소해서 피고의 유죄 판결을 받아냈다만." 그 말을 듣고 너의 얼굴은 미묘하게 바뀐다. 그 얼굴은, 이유를 알겠다는 얼굴이로군. "너…" 무슨 말을 하려다가, 생각을 바꿨는지 입을 다시 다문다. "뭔가?" "…사실은, 피고자가 범인이어서 유감스러운 거 아냐?"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나루호도. 나는 검사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반박하자 너는 당황해한다. 내 심기가 불편해 보이기에 그러는 거겠지. '어디 한번 들어주지'라는 듯한 표정을 꾸미고 팔짱을 낀 채 너의 말을 기다린다. 네가 해 주는 말은, 나의 진실일 테니까. "너는 검사니까, 피고인을 유죄라고 생각하고 의심할 수 밖에 없어. 조사도, 심리도, 모두 '피고인은 범인이다'라는 가설을 향해 이루어지지. 그렇게 해서 정말 피고인이 범인이라는 게 밝혀져 유죄 판결을 받게 되면 네가 유감스러운 거야. 왜냐하면 사실은 넌……" 너는 마지막 말을 남겨둔 채 말을 끊는다. 아마도 그 다음 말을 해도 괜찮을까 고민하는 거겠지. 하지만 말해도 된다. 왜냐하면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피고인을, 믿고 싶은 거야. 그렇지?" 그렇지만 굳이 이 사실을 너의 입으로 듣고 싶어하는 나도 어딘가 이상한게 아닌가 생각한다. 너에게 매도 당하고 비난 당해도, 너이기에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런 말을 하게 하지도 이런 말을 듣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좋아, 듣고 싶었던 말은 다 들었다. 이것으로 이제 됐어. 내 흔들림에 너까지 휘말리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까…… "나루호도 자네에게서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군." 너에게서 등을 돌려 내가 가야하는 길을 걷는다. 너의 길과는 다른, 검사 미츠루기 레이지의 길을.
「검사 미츠루기 레이지는 죽음을 택한다」
나루호도 네 말을 이정표로 삼고, 잠시만 생각하고 오겠어.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러니까 나루호도 류이치, 너만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주길…….
----- 080822 물론 미츠루기가 사라지기 전에 나루호도는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으니까 이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로군요. 하지만 왠지 나루호도의 말에 위안을 얻는 미츠루기가 쓰고 싶어서. 누군가에게 진실이 될 수 있는 존재, 라는 설정 좋아합니다^///^
미츠루기의 딱 떨어지는 말에 나루호도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더 이상의 반박이 없자 미츠루기는 홀가분하다는 듯이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대낮부터 검사실에 찾아와서 하는 말이 저거라니. 어이가 없는 것도 정도가 있다. 미츠루기는 여유롭게 홍차를 마시면서 파일을 뒤적거렸다. 사건을 정리해놓은 파일을 훑어보고, 내일 오전에 있을 재판 자료를 머릿속에 넣어놓아야 한다. 그런데,
아까부터 나루호도가 말이 없다.
"...나루호도?" "..."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루호도의 모습에 미츠루기는 의아함을 느꼈다. "이봐, 나루호도?" "...윽."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나루호도가 황급히 뒤로 물러선다. 그러나 미츠루기는 이미 보았다. 나루호도의 눈에 글썽이는 눈물을.
"나, 나루호도..." "으, 난 너한테 토노사맨보다 못한 존재라 이거지? 아, 알고 있었다 뭐!" 그런 말은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되는군, 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눈물을 참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고, 파란 양복 소매로 눈가를 슥슥 훔치면서 서 있는 나루호도의 모습에 미츠루기는,
"...설마, 삐진건가?" 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야!" 나루호도는 분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더니, "간다!" 하고 외치고는 휙 뒤돌아섰다. "잠깐!" 미츠루기는 나가려는 나루호도의 손목을 낚아채,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런 걸로 화를 내는 건가? 너는." "...누가 화를 냈다고 그래." 미츠루기의 시선을 피하면서, 나루호도는 말 끝을 흐렸다. 이런 말로 상처받을 나루호도가 아닌데, 생각하면서 미츠루기는 일단 나루호도를 달랬다. "농담이네, 나루호도. 토노사맨을 좋아하는 것과 너를 좋아하는 것이 다른 거라는 거, 알고 있지 않나." "..." 아, 조금은 풀린 걸까. 도대체 어디서 누구한테 무슨 말을 듣고 왔길래 이렇게 소심해진 거지. "네가 훨씬 더 중요한 게 당연하잖아." "...윽." 달래려고 한 말이었는데 그 말에 참고 있던 눈물을 떨어뜨리는 나루호도의 모습에 미츠루기는 매우 당황했다.
“잠깐만, 나루호도!”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들으라는 거야!” “잠시만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 그대로 나갈 생각인가?” “하아… 그래, 방금 전 상황에 대해 설명 좀 해 주겠어?” “…아주 지극히 당연한 남자의 생리욕구현상이다.” “그런 건 나도 알아. 근데 왜 그 생리욕구현상이 지금 일어나냐고.”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좋아하는 상대가 눈 앞에서 무방비하게 자고 있는데…” “너는 자고 있는 상대를 덮치려고 하냐?!” “내가 성급했던 건 사과하겠다. 그러나 지금 네 차림이 어떤지 보고 그런 말을 해 줬으면 좋겠군.” 미츠루기와 계속 신경전을 벌이던 나루호도는 미츠루기의 말에 비로소 자신에게로 눈을 돌렸다. 셔츠의 단추가 반 이상 풀어진 채 한 쪽이 어깨 밑으로 흘러내려 있었다. “!!” “네 모습이 너무… 으음, …그래서, 너에게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 거다.” 그 키스로 잠에서 깬 나루호도는 위에서 자신을 내리누르는 미츠루기가 덮치려는 것이라고 생각해, 깜짝 놀라 같이 자던 침대에서 뛰쳐나온 것이었다. “날 너무 변질자 보듯 보지 말아주길 바라네. 그 눈빛은 불쾌하군.” 완벽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미츠루기에게 나루호도가 경계를 풀었다. “…미안해, 미츠루기.” “됐어. 그보다 빨리 옷이나 제대로 추스르게.” “으응…” 고개를 숙인 채 셔츠의 단추를 채우는 나루호도의 귀에, 방으로 먼저 들어가는 미츠루기의 작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남들에게는 비밀로 한다지만 자신들도 어엿한 연인인데, 자신이 너무했나 싶어서 나루호도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치만 놀랐는걸…” 자신에게 변명하듯 중얼거리고 다시 침실로 돌아온 나루호도는, 미츠루기가 잠옷을 벗고 양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다. “뭐야, 너? 갑자기 옷은 왜 갈아입어?” “출근하겠다. 지금은 이 이상 너랑 함께 있어봤자 너만 곤란하게 할 뿐이다.” “자, 잠깐…! 지금 새벽 4시 반인데?” “괜찮아. 내 사무실로 가면 돼.” 셔츠의 단추를 다 채우고 목에 프릴을 달려는 미츠루기의 손목을 덥썩 움켜잡았다. “뭔가?” 담담한 척 하지만 상처받은 눈을 하고 있는 미츠루기의 얼굴에 나루호도는 할 말을 잃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루호도는 미츠루기의 입술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댔다. “미안해, 미츠루기. 우리, 사귀는 사이인데…” “나루호도…” “너랑 같이 살기 시작한 때부터 이런 일이 있을거라 생각했어야 했는데. 같이 자기까지 하는데 성욕을 느끼지 말라고 하는건 억지였어. 그치?” “…….” “가지 마. 나랑 좀 더 같이 있자. 나 지금 엄청…” 나루호도가 미츠루기의 귓가로 얼굴을 가져가더니 작게 속삭였다. “하고 싶어졌어.” 그 말을 하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수줍어하는 나루호도의 모습에, 미츠루기는 나루호도를 끌어안아 입을 맞추며 입었던 옷을 다시 벗기 시작했다. 미츠루기는 그렇다 쳐도 난 오늘 출근 못 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루호도는 얌전히 미츠루기가 하는대로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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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229
겨울의 끝과 연결되는 후일담은 아닙니다만... 연애 초 미츠루기와 함께 살게 된 나루호도라는 설정만 자꾸 쓰게 되네요. 지금 보니 어떻게보면 겨울의 끝부터 이 글까지 세 편이 모두 연결되는군요. 이후의 내용은 제가 능력이 안 되고 또 민망한 관계로 알아서 상상해 주세요. 사실 제 미츠나루는 왜 키스까지밖에 진도를 못 나갈까 스스로 자책하면서 쓴 글입니다. (하지만 결국 키스에서 끝...)
“앗, 비 온다.”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한 나루호도는 난처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바빠서 딱 하루 일기예보를 체크하지 못했는데, 하필 그 날 비가 오다니. 어쩔 수 없지, 중얼거리며 서류가방을 가슴에 품고 몸을 한껏 웅크린 채 재판소 건물 밖으로 발을 옮겼다. 자신의 몸을 적시는 빗방울이 느껴지지 않아 어라? 하고 위로 고개를 올린 나루호도는 붉은 빛의 우산이 자신을 씌워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왼쪽에는 붉은 빛의 검사가 서 있었다. “어라, 미츠루기? 여기서 뭐해?” “그러는 너야말로 우산도 없이 뭐하고 있나. 법정 계관에게 우산을 빌리면 되는 것을.” “에, 그래도 돼? 몰랐다…” 미츠루기는 살짝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루호도를 보다가 “오늘은 됐어. 내가 씌워주지.” 하고 말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나루호도는 젖지 않도록 재빨리 미츠루기를 쫓아 그와 발걸음을 맞추어 걸었다. 퇴근 시간이라 거리는 인파로 가득 차 있어서, 계속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거리를 걸어갔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와라, 나루호도. 어깨가 젖는다.” “으응. 그러는 너야말로.” 둘은 피식 웃으면서 멀리 했던 거리를 가까이 했다. “근데 너 오늘 차는?” “안 가지고 왔다.” “왜? 무슨 일 있어?” 나루호도의 물음에 미츠루기는 잠시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법원에서 멀어져 둘은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건물을 등지고 서서 신호를 기다렸다. “사실 오늘, 검사들끼리 회식이 있다.” “에엣?” 나루호도의 얼굴에 당혹감과 난처함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미츠루기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별로, 너 때문은 아니다.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자리이니까.” “그래도… 너, 가겠다고 약속한 자리 아냐?” “아니. 딱히 가겠다고 대답한 기억은 없다만.” “그래… 그래도 왠지 미안하네.” “네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내가 그러고 싶었을 뿐이니까.” “응?” 우산이 살짝 시야를 가리도록 내려와서 안 보인다고 말하려는 순간, 미츠루기가 전에 없이 달콤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루호도, 키스해도 되겠는가.” “…뭐?” 나루호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미츠루기가 입을 맞춰왔다. 순간의 정적. 순간의 어둠. 횡단보도의 보행자 신호 소리가 들려오자 미츠루기는 금방 입술을 떼고 아무렇지 않은 듯 우산을 들어올렸다. “너, 너...! 이렇게 사람이 많은 길거리에서… 누가 보면 어쩌려고!” “괜찮아. 지금은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고 있으니까.” 이런 뻔뻔스러운 놈... 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루호도는 붉어진 뺨을 감추지 못했다. “돌아가서 같이 와인 한잔 할까? 나루호도.” “크리스마스는 벌써 지났는데?” “뭐 어떤가. 아직 겨울이다.” 그렇게 말하며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미소를 짓는 미츠루기에게, 나루호도는 한없는 애정을 느끼는 것이었다. “좋아.” 대답하며 나루호도는 다른 사람들은 모르도록 살짝 미츠루기에게 몸을 기대어 팔짱을 끼고는 함께 횡단보도를 건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