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벌써 봄이었지만, 요 며칠 이어진 봄비로 하늘은 우중충했다. 게다가 비가 온 탓인지 쌀쌀해져서, 겨울이 다시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때에는 플라티나가 감기에 걸리기 쉽기 때문에 신경을 써야해서 귀찮다. 아니, 어느 계절을 불문하고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지만... 일단 자신이 모시는 상관이니 돌보지 않을 수도 없다. 이런, 염려하던대로 플라티나가 감기로 앓아누웠다는 전갈이 왔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왕자님이라니까... 카롤에게 플라티나의 간호를 맡기고, 자신은 플라티나의 업무를 대신 처리했다. 오늘 밤도, 비가 내린다.
“제이드. …제이드!”
누군가 부르는 소리. 무거운 눈꺼풀을 여니 검은 인영이 어른거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일을 하다 책상에 엎드려서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빗소리에 섞여 매우 희미했다. 자세히 보니 어둠 속에 몸을 숨긴 그것은, 사피루스였다.
“뭐야, 너였냐… 무슨 꼴이야, 그게.”
비에 흠뻑 젖어 보랏빛 머리칼도 검정색 망토도 축 늘어져, 바닥에 깔아놓은 천에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죄송합니다. 급하게 오느라…”
“연락용 새는?”
“비가 와서 못 쓰지 않습니까.”
아차, 그랬지. 라고 속으로만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봄비라고는 하지만 밤이었고, 흠뻑 젖었기 때문에 추웠는지 사피루스는 몸을 떨며 서 있었다. 수건을 건네주자 사피루스는 작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면서 물기를 닦았다.
“어쨌든 좀 더 안쪽으로 들어와. 춥잖아?”
“아뇨, 괜찮습니다. 누군가 오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요...”
“네가 감기 걸려서 기침해대다 걸리는 것보단 낫겠다. 자, 빨리 이쪽으로 와.”
사피루스는 잠시 망설이다 화톳불이 있는 안쪽으로 다가와 앉았다.
“옷 벗지? 말려야 하잖아.”
“아뇨! 옷은… 저어, 괜찮습니다. 망토만 벗으면…”
망토를 화톳불 앞에 펼쳐놓고, 무릎을 감싸안은 채 앉아있는 사피루스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담요를 푹 뒤집어쓴 채 추워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이 꼭, 작은 짐승같다.
“제이드, 세레스님께서…”
아아, 그렇지. 하기사, 그 일이 아니고서야 이 시간에 이 비바람을 헤치고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없다. 사피루스가 아까보다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재빨리 세레스의 명령을 전한다. 전언을 받은 건 며칠 전이지만 요즘 계속 비가 오는 바람에 오늘까지 미뤄진 모양이다. 앞으로의 일을 간단히 논의한 후로는, 사피루스도 자신도 아무 말 없이 앉아있을 뿐이다. 사피루스의 망토는 아직 반도 마르지 않았다. 사피루스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간헐적으로 물방울이 떨어져 흘러내렸다.
“술 마시지 않겠어?”
“…일하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아-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플라티나가 해야하는 일이니까. 직무유기는 내가 아니라 그쪽이라고.”
자기합리화를 늘어놓으며, 한쪽에 숨겨두었던 술병과 잔을 꺼냈다. 사피루스는 상당히 오랜만에 술을 마시는 듯 했다. 하긴 일하느라 바빠서 술 마실 틈이 없었겠지. 나 또한 그랬으니.
“…봄 같지 않네요.”
사피루스는 여전히 작은 소리로 속닥거렸다. 깊은 새벽의 정적을 깨지 않는건 좋은데, 저 빗소리에 네 목소리가 묻혀 버린단 말이지. 사피루스의 잔에 술을 따라주면서 더 가까이 앉았다.
“그래?”
“꽃이… 보고 싶어요. 비가 오면 기껏 핀 꽃도 다 져버려서……”
사피루스는 살짝 우울한 듯 고개를 숙이고 들고 있는 술잔만 만지작댄다.
“음. 그건 좀 유감스럽긴 하지만 난 봄비도 가끔은 좋던데.”
사피루스 네가 직접 찾아오기도 하고 말이야, 라는 뒷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요?” 하고 묻는 사피루스는 내 미소의 의미를 모른 채 고개만 갸웃댔다.
그 순간.
밖에서 찰박, 하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있다!!!
둘 다 잔뜩 긴장해 입을 다물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사피루스는 구석 쪽으로 조용히 몸을 숨겼고, 자신은 조심스레 막사 밖을 내다보았다.
야옹- 하는 소리와 함께 그것은 젖은 나뭇잎을 찰박 소리가 나도록 밟고 도망갔다.
“…고양이었군요.”
소리의 정체를 알고 나나 사피루스나 피식 웃었다. 고양이의 발소리에도 놀라 숨죽여야 한다니. 자신의 경우는 자조적인 웃음이다.
“어쨌든 비도 그친 것 같으니 이만 가야겠습니다.”
사피루스는 적당히 마른 망토를 걸치며 돌아갈 준비를 했지만, 동이 트지 않아 아직 하늘은 어두웠다. 술은 반도 다 마시지 못했고. 어쩐지 아쉬워져서 자신도 모르게 사피루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제이드?”
왜 그래요? 하고 묻는 눈으로 나의 얼굴을 바라본다. 차마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한 채, 시선을 아래로 깔고 눈앞에 있는 사피루스의 망토 끈을 리본 모양으로 묶어주었다. 나의 얼굴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갑자기 사피루스가 나를 살짝 껴안아온다.
“무, 뭐...!”
“너무… 외로워하지 말아요. 또 올께요.”
“…….”
목 뒤로 둘러진 사피루스의 팔과 손은 그의 말과 마음만큼이나 따스했다. 나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아직 조금 젖어있는 망토의 물기에 입술을 갖다댔다. 그리고 내 손을 그의 허리로 둘러 힘주어 강하게 꽉 끌어안았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너와 만날 수 있을지.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너를 안을 수 있을지.
외롭다. 괴롭다. 이곳에서 나 혼자만 천사인 것은. 단 하나뿐인 동족과 이렇게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것은. 그 동족과 서로 싸워야 한다는 것은.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나 자신을 타이르고, 사피루스를 안은 팔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사피루스도 나를 껴안았던 팔을 풀고 나에게서 떨어진다.
“그럼 갈께요.”
“아아.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
“네.”
사피루스는 살짝 미소짓고는,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막사를 빠져나갔다. 나는 멍하니 그가 멀어져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서히 동이 터 오고 있었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금방이라도 다시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흐린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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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408
주제는 '제이드도 외로운 날이 있다'였습니다^ㅂ^...
아무리 밉살맞게 굴어도, 같이 죽음을 헤쳐온 단 하나뿐인 동족입니다.
사피루스에게 자신의 속마음이나 속사정까지는 솔직하게 말하지 않더라도, 정신(심리)적으로 기대버리거나 하는 일도 있겠죠. 그리고 사피루스도 생각보다 어른이기 때문에 그런 제이드를 먼저 알아채고 위로해준다던지 할 것 같네요. (팬디스크 때의 사피루스로는 무리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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